210527
나의 이야기 (21) 엄마와 예천에 다녀오다- 1966년 김천 고등학교 1학년
지난 글에서는 울 아부지와 예천 다녀 온 얘기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울 엄마와 예천엿집에 수금하러 다녀 왔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이 사건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일어 난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울 엄마가 얼마나 현명한 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진태야, 이번에 예천엿집에 수금하러 가는데 니도 가자. 가면 가져올 게 많다.”
오랜 만에 공장을 안 돌리는 날이라, 숨을 돌리고 있는데 엄마가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예천에 도착했더니 시간이 정오 쯤 되었다. 엄마가 예천엿집에 얼른 가셔서 수금을 하시더니 예천 장바닥으로 데리고 가셨다. 뭐 맛 있는 것 먹게 되나 했더니, 거기서 왠 빨간 고추를 산더미처럼 사셨다. 아직 말리지 않은 고추라 무게도 많이 나가는 것을 한 40근을 사시니 그게 큰 짐이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오신 주된 이유이다. 그래 그 놈을 둘이 짊어지고 일부는 짐꾼에게 지게 하고, 남들 눈총을 받으면서 기차간에 싣고 가지고 왔다. 불만이 가득한 내 눈을 보더니 엄마가 기차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야, 예천은 태양초 생산지로 유명해서 김장 때가 되면 모두가 예천에 와서 말린 태양초를 사 가는데 그 때 됨 값이 2배는 뛴단다. 지금 사면 말리지 않은 고추라 무게가 무겁고 다루기 성가시긴 해도 헐값에 사는 거란다. 이거 말려서 가을 김장 철에 반만 팔아도 고추값 나오고 남는다. 그럼 남은 것으로 우리 김장하면 되지.”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도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아니, 난중에 김장할 때 장에 가서 삼 되지 왜 이렇게 성가시게 이런 짐을 들고 여행을 하게 하실까?”
예천 가서 거래처 아들과 한 잔하고 놀다 오려고 따라 갔는데, 놀기는 커녕 고추 더미를 잔뜩 짊어지고 오느라 한여름에 땀깨나 빼었던 내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걸 갖고 집에 오니 엄마가 그 놈을 햇볕에 늘어놓고 말리시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궁이에 불을 짚여서 아랫목 사방에 늘어놓고 그걸 말리셨다. 그래 또 짜증이 났다.
"아니 이 더위에 고추 말린다고 불까지 때서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매운내가 나서 잠도 못 자겠다 아이가. 아이고, 좀 쉽게 사시지." 내가 속으로 불평했다.
고추가 바싹 건조하니까 40근이 20근으로 줄어들었다. 김장 철이 되니 엄마가 그 반인 말린 고추 10근을 김천 장에 가지고 가시더니 팔아 오셨는데, 말씀하신 대로 예천에서 생고추 40근 산 값이 더 되었다. 그래 남은 10근으로 그해 가을 김장을 넉넉히 하셔서 그 해는 태양초로 양념한 맛있는 김치를 계속 먹을 수 있었다. 김장하고도 상당히 남아서 그건 또 두고두고 먹었다. 장에 다녀오신 엄마가 행복해 하시며 말씀하신다.
"봐라, 내 안 카더나. 반만 팔아도 우리 산 값은 번다꼬. 올 김장도 고추값은 한 푼도 안 든기라."
이 사건은 울 엄마의 지혜의 일면을 보여 주는 예이다. 사실 김장 때 뿐이 아니다. 엄마는 어디든 외처를 가시면 거기 시장부터 들르셔서 거기서 김천보다 싸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살피셨다. 집에 돌아 오실 때에는 절대 빈손으로 오지 않으시고 바리바리 한 짐씩 들고 오셔서 그걸 김천 장에 팔고 남은 것을 우리가 먹게 하셨다. 어느 날은 외처에 다녀오시더니 일꾼을 써서 콩자루를 잔뜩 지고 오게 하셨다. 또 뭔고 했더니, 그해 메주를 담글 콩의 2배는 되는 메주콩을 사오신 것이다. 이번에도 반은 팔고 반을 가지고 메주를 담으셨다. 결국 김장하실 때도, 메주콩 삶으실 때도 고추값과 콩값은 한 푼도 들지 않은 셈이다. 엄마는 이런 일을 매년 거르지 않고 하셨다.
그때는 엄마의 하시는 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 나이가 좀 들어서 생각하니 울 엄마 정말 지혜로운 분이셨다. 엄마를 추억할 때마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성경말씀이 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언 30: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