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10일 “무룬으로 가는 길”
오늘은 몽골 다섯째 대도시인 인구 4만의 무룬으로 떠나는 날이다. 이르디닛에서 무룬까지는 약 430 킬로로 임 선교사의 계산에 의하면 9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했다. 물론 중대한 계산착오였음이 나중에 밝혀지긴 했지만 말이다. 에스더 사모의 친구들인 쟌네 일행은 도라가 초콜렛 중독으로 어제부터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데다 당뇨병이 도져서 더 이상 이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에스더 사모와 함께 다운자이의 차로 울란바타르로 떠나고 임 선교사와 유니스, 리라 부부와 임집사 모자와 함께 오전 9시에 이르디닛을 출발했다. 그동안 비가 와서 도로사정이 안 좋을 것은 예상했지만 날씨가 특별히 호전될 기미도 없고 내주에는 다른 사역으로 바쁘기 때문에 여행을 강행하기로 했다. 비 온 뒤라 외려 길이 다져지고 비포장도로의 먼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이르디닛 시내를 벗어나니 나담 축제를 위해 게르가 늘어선 시설들이 눈에 뜨여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로프와 덮개를 사서 차 지붕 위에 실은 짐을 더 단단하게 묶고 출발했다.
이르디닛에서 볼강까지 53킬로에 이르는 도로는 한국의 삼한기업이 시공하여 작년에 완공한 포장도로라 도로사정이 아주 좋아 상쾌하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과거에 길이 포장되기 전에는 이르디닛에서 볼강까지 차로 6시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길이 나빴으니 작년 도로가 개통된 후부터 교통량도 급격히 증가하고 볼강의 개발도 가속도가 붙었다고 했다. 사회간접자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도로정비인데 몽골은 아직도 대부분의 길이 승용차가 다닐 수 없는 험로이다. 이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로부터 정비해야 할 것이다. 일단 도로가 정비되고 나면 수송이 원활해져서 광산이나 유전개발 등도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물류뿐 아니라 다른 문화적 교류도 빨라져서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도로를 정비하는데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도 없고 기술력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큰 문제는 추진력 있는 지도자의 부재라 하겠다.
볼강도 인구 1만 3천의 제법 큰 도시로 임 선교사는 이 곳에도 교회를 개척할 꿈을 가지고 계셨다. 이르디닛에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임 선교사가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교단에서 Jeremy 와 Renee 가족이 이 곳에서 사역하고 있으나 아직 전도에 진척이 없다고 했다. 그 동안 단기 선교팀들도 여러 번 가서 전도를 해서 열매를 맺었으나 문제는 서양인에 대한 몽골인들의 반감과 위화감이다. 이미 전도한 가정에 제레미가 찾아 가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과 백인의 차이이다. 몽골인들은 70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존심이 극도로 상해 있다. 거기에다 몰몬이 이단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백인만 나타나면 러시아인이나 몰몬으로 착각하고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또한 제레미의 체구가 장대한 것도 몽골인들에게는 위협이 되는 것이다. 동남아를 다니면서 절실히 느낀 사실은 이제 백인들의 선교는 끝났다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인은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는다. 사실 우리 교단에서 몽골에 세운 7 개의 교회도 모두 우리 한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된 것이다. 제레미 부부는 내년이면 한 텀이 끝나서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과연 이 분들이 다시 이 곳으로 돌아 올 것 같지 않다. 이 곳에 백인이라고는 이 분들 밖에 없어 외로움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까운 세월과 선교비를 언어공부와 현지적응에 투자했는데 아무 열매도 없이 모교회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의 현실이 참 딱했다. 이 두 사람은 우리 사위 죠수아와 은정이의 친구로 얼라이언스 신대원에서 함께 수학했다. 가는 길이 바쁘기 때문에 이번에는 방문을 못하고 무룬에서 돌아 온 후 한번 방문해서 격려하고 전략을 의논할 예정이다.
오전 10시 정도에 볼강을 지나니 비포장도로가 시작되는데 그 동안 내린 비로 온통 진창이었다. 길도 어떻게 된 것이 하나가 아니고 들판에 널린 것이 길이었다. 광활한 평원에 무질서하게 널린 길들이 꼭 어린 아이가 백지에 아무렇게나 줄을 그어댄 것 같았다. 길에 관해서 이런 몽골속담이 있다고 했다.
"여행을 하노라면 어디를 가든지 천 개의 길이 있다. 그리고 당신은 또 하나의 길을 만든다."
길을 가다가 앞이 험하면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 어디든 뚫고 나가는 것이 체질화된 몽골인들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면 그 동안 내린 비로 진창인데 볼강에서 다음 도시인 온트까지 도로 공사 중이어서 공사 때문에 쌓아놓은 흙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어서 길을 찾는데 애로가 많았다. 볼강에서 온트까지는 약 150 킬로로 쿠웨이트에서 차관을 제공해서 시공을 하고 공사는 중국의 류공에서 맡고 있었다. 과거 이락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제일 먼저 이락을 비난했던 국가가 몽골이었기 때문에 쿠웨이트 정부는 몽골인들에게 극히 우호적이어서 이런 대규모 차관도 기꺼이 제공한다고 했다. 현재는 온트까지 구간만 공사를 하지만 장래에는 무룬까지 도로가 포장된다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무룬에 가서 선교의 기지를 닦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다. 현재는 너무 멀고 힘들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임 선교사와 리라와 내가 교대로 운전을 하는데 진창을 달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길을 가다가 잘못 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바로 차를 돌려서 새로운 길을 만들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을 확실히 잡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기 때문에 도시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런 여행인 현지인을 대동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유니스와 리라를 대동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진흙탕 길을 지그재그로 달리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재미로 진흙탕에서 경주하는 머드 레이싱이란 경기가 있는데 지금 내가 한 운전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험했다. 이런 재미있는 체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가 절로 나왔다.
물론 진창에 차가 빠지면 그 때부터는 지옥이다. 얼마 전에 한국선교사들 가정이 함께 무룬으로 가다가 이 곳에서 차가 빠져서 남자들은 팬티만 입고 4마일 가량을 차를 밀었다고 했다. 말이 그렇지 진창 속을 폭우를 맞으며 밤새 차를 밀어보라. 차를 밀다가 갑자기 차가 빨리 나가면 그대로 얼굴째 진창 물에 키스를 하는 수도 많다. 아마도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어서 차가 빠지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길에 익숙한 리라가 동행했기 때문에 사고를 미리 예방할 수 있었다. 이런 데서 운전할 때에 주의해야 사항들이 몇 가지 있다. 바로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앞을 똑바로 보면서 하시라도 핸들을 꺾을 준비를 하고 가야 하고 굴곡이 급격한 곳은 최대한 속도를 줄여서 거북이처럼 움직여야 차가 뒤집어지지 않는다. 길이 굴곡이 너무 심할 경우에는 일부러 차를 물웅덩이로 물고 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해야 차가 뒤집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웅덩이 속을 헤매다 보니 차는 온통 진흙으로 도배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임 선교사의 차가 SUB가운데서도 튼튼하기로 유명한 도요다 랜드 크루저인 것이다.
미국에서 사정을 모를 때는 임 선교사가 랜드크루저를 타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마음에 시험이 된 적이 있었는데 현지에 와 보고서야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 가를 깨달았다. 이 곳에서는 차가 좋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도로사정이 최악이라 보통승용차로는 사역이 불가능한 것이다. 연중 가장 기후가 좋은 7월에도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데 연중 8개월 동안이 빙판인 겨울철에는 오죽할까? 작년 11월 자르갈랑에서 당했던 사고도 보통 승용차였다면 임 선교사는 이미 천국에 계셨을 것이다. 그 사고로 차가 전파되어 현재 차는 중고차를 새로 샀던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선교지의 현실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섣불리 선교사를 비판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회개했다. 우리는 참 비판하기를 즐겨 한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남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기 좋아하고 비판하기를 즐긴다. 아마도 하나님의 처사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 인해 죄를 범했던 이브의 피가 우리 안에 아직도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나 보다. 교회의 분란도 모두 비판하기 좋아하는 우리의 태도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달라야 한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도와주겠다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첩경이다.
진창 길을 1시간 정도 달리고 나니 길이 그런대로 운전할 만 했다. 온통 각색의 꽃으로 치장한 들판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고 산골짜기마다 나무들이 즐비한 것이 사진으로 보는 스위스의 풍경 같았다. 잠시 차를 멈추고 쉬노라니 유니스와 리라가 빨간 꽃이 있는 식물을 손삽으로 파서 챙기고 있었다. 무엇인지 물었더니 감자의 일종인데 복통과 두통에 특효약이라고 했다. 아마 카페인이나 아편성분이 함유된 식물인가 보다. 그 외에도 곳곳에 유채꽃이 만발했는데 임 선교사에 의하면 바로 이 유채꽃들이 제주도까지 옮겨 갔을 것이라고 한다. 조금 더 차를 몰다 보니 유럽청년들이 두 명이 자전거를 세워놓고 쉬고 있었다. 나이가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1명과 여자 1명이었는데 스위스에서 울란바타르까지 비행기로 와서 1달 예정으로 무룬까지 자전거 여행을 한다고 했다.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야영을 하면서 가려고 자전거 뒤에 천막과 장비를 실은 작은 트레일러를 싣고 있었다. 하루에 30내지 60 킬로씩 달릴 예정이라 하니 뜨거운 태양과 때로는 폭우 속을 달릴 그들의 여정이 눈에 훤히 보였다. 편안한 휴가보다는 자연 그대로 보존된 이국 땅 몽골에 와서 자전거로 한 달간의 모험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비슷한 팀을 한 팀 더 만났다. 이번 팀은 스웨덴 청년들이었는데 이들도 자전거로 무룬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리라가 차를 몰고 가다가 게르 한 곳에 멈추었다. 천막 안에 들어가니 전형적인 소가족용 5조짜리 천막이었다. 가운데에는 난로가 있고 천막 중앙에 있는 구멍으로 연통을 내어서 열효율이 아주 높았다. 바깥에 비가 내려서 따뜻한 난로 앞에 앉아서 주인이 제공하는 뜨거운 몽골 차를 마시니 심신이 편안해졌다. 한 구석에는 한국에서 평상같이 생긴 곳이 있었다. 거기에서 온 가족이 침식을 해결하는 곳이다. 이 게르는 부모와 딸 세 가족이 사는 곳이다. 그러나 긴 겨울 기간 동안 연료를 절감하기 위해 대형 게르에 일가족 2대, 3대가 같이 거주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아무 칸막이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양털 속에 홀랑 벗고 자는 습관이 있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래서 몽골여성들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홀랑 벗고 갈아입어서 외국인들을 황당하게 만든다고 했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성에 눈 뜨는 것은 물론 근친상간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다. 보통 결혼을 하고 나면 남자 부모가 게르를 제공하고 여자 부모가 가구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으나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신랑이 빈 몸으로 신부네 가족의 게르에 기생하게 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 신혼부부끼리의 호젓한 시간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고 심지어는 장모나 장인이 사위가 밤일도 못하게 핍박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 게르는 1가족용 소규모 천막가게이지만 갖출 것은 갖추었다. 과자도 있었지만 이 곳에서 주로 파는 것은 몽골어로 “애이락”이라고 부르는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몽골 고유한 음료인 마유주였다. 지역마다 마유주의 질이 다른데 볼강 근처의 마유주가 질이 제일 좋다고 했다. 아마도 이 지역의 토양과 기후가 말에게 가장 적합하여 양질의 말젖을 생산하기 때문이리라. 리라가 이 곳을 찾은 것도 이 지역 애이락의 품질이 우수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유주는 알코올 농도가 3 퍼센트밖에 안 되는 건강음료로서 맛은 한국의 막걸리와 흡사하다. 안에 요구르트 성분이 진한 온갖 비타민의 보고이다. 1년 중 여름 1달 동안만 생산이 가능하여 몽골인들이 겨울에 대비할 수 있도록 영양을 공급하는 음료로서 내 입에는 아주 잘 맞았다. 마유주를 처음 마시는 사람은 그 영양이 너무 강하고 맛이 특이하기 때문에 비위도 상하고 배탈로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예외인가 보았다. 몽골인들은 손님이 오면 여름철에는 반드시 애이락을 접대하는데 이 때 애이락을 주는 대로 모두 받아 마셔야 친구로 인정을 받는다. 잔치 때 내오는 마유주는 보드카를 타서 가지고 오기 때문에 멋모르고 마시면 큰 고생을 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 철수한 김 야곱 선교사는 애이락이 입에 맞지 않아 애로가 많았다고 했다.
주인의 양해를 구하고 이르디닛에서 가지고 간 빵과 음식을 꺼내서 게르 안에서 애이락과 몽골 차를 마시면서 점심을 나누었다. 몽골차는 말젖에다 물을 타서 끓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하급 차를 타서 마시는 것인데 먹어보니 맛이 괜찮았다. 몽골인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은 외국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차도 중국말 그대로 “차이”라고 부른다. 차는 당나라 때 몽골에 수입된 것으로 몽골인의 건강개선에 큰 기여를 했다. 차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임산부들의 사산율이 50 퍼센트가 넘어 건강관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나 중국에서 차를 수입해서 먹으면서 대폭 개선되었다고 한다. 차는 고급품은 아니고 싸구려 찻잎을 오래 두어서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된 것을 망치로 짜개서 말젖에 섞어 끓인다. 야채를 먹지 않음으로 인한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건강문제는 몽골인의 수명을 줄이는 주범이다. 고기가 주식인데다가 기름을 선호하기 때문에 고혈압에 콜레스테롤 누적으로 피부가 쉬 거칠어지고 나이 사십을 겨우 넘기고 죽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같이 동행한 현재 50세인 리라의 경우도 동년배의 친구들이 거의 죽고 없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한국 촌부처럼 수더분하게 생긴 30대였고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딸이 함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벽에 걸린 옷에 한국말로 브랜드가 적혀 있었고 아이가 입은 옷도 한국산이라 했다. 아이가 붙임성이 있어서 수염 있는 내 모습이 신기한지 옆에 착 붙어서 애교를 부렸다. 임 선교사는 여기서도 선교사의 일을 하셨다. 가지고 갔던 머드랑 비누 셋을 하나 선물로 드리고 아이에게는 캔디 한 팩을 주었다. 앞으로 이 길을 자주 지나갈 테니 잘 사귀었다가 복음을 전해서 이 근처에도 셀 그룹을 형성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은혜를 끼치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선물을 주었더니 아이가 한국동요를 우리 앞에서 불러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아주머니도 울란바타르에서 지영이라는 한국아가씨를 사귄 적이 있다고 했다. 참 몽골인들과 한인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나 보다.
식사를 마친 후 오후 1시경에 다시 길을 재촉하니 길이 온통 자갈길이었다. 길이 메마른 관계로 앞차를 따라 가다 보면 먼지를 항상 뒤집어 쓰게 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앞차를 서로 추월하느라 경쟁할 때가 많았다. 이 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급한 마음에 자갈 길을 빨리 달리다가는 조그만 돌에도 타이어가 찢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돌들이 하나같이 모난 돌들이라 날카롭기 그지없다.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온트 근교에서 타이어가 망가지는 비극을 체험했다. 그 때가 오후 3시 쯤이라 햇볕이 따갑기가 이를 데 없는 와중에 이런 사고를 당했다. 마침 임 선교사가 운전하던 중에 사고가 발생하니 임 선교사를 보는 조카 마이클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리라와 내가 운전할 때에는 문제가 없다가 임 선교사가 교대하고 얼마 안되어서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물론 삼촌이라 만만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타이어를 갈려고 작업을 하다 보니 아까 우리가 추월했던 차들이 다가와서 기웃거리다가 지나갔다.
도로상태가 험악하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길을 떠날 때에 스페어 타이어 외에도 2개정도의 예비 타이어를 차 지붕에 싣고 다니고 타이어를 고치는 장비도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임 선교사도 경험이 있는지라 준비는 잘 했는데 타이어 고치는 장비를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타이어를 고치는 도구를 다 챙겨서 상자에 넣어서 문 앞에 놔 둔 것을 에스더 사모가 홀랑 다른 차에 싣고 가 버렸던 것이다. 계절이 마침 여름이라 큰 위험은 없지만 이런 사고가 겨울에 발생하면 혹한 속에 얼어 죽기 십상이라 했다. 한 번은 길을 가다가 여덟 번이나 타이어가 터진 경험도 있다고 했다. 임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길에서 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몇 번이나 내게 당부했다. 실제 사역 자체에 보내는 시간보다 이런 일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선교지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스페어 타이어를 꺼내는 작업도 처음 하는 작업이라 방법을 몰라서 1시간 이상을 리라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작업을 하여 겨우 해결했다. 리라가 없었으면 참 어려웠을 여행이었다. 정비소에서 차를 보수할 때에도 차를 고치는 동안 주인이 지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의 부품 중 쓸만한 것은 다 빼내고 노후부품으로 교체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웬만한 부품은 울란바타르에만 있기 때문에 차에 문제가 생기면 울란바타르까지 끌고 와서 죽치고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우선 스페어 타이어를 꺼내서 갈아 끼우고 타이어 고칠 만한 곳을 찾아서 길을 가는데 주유소에도 정비시설은 전무했다. 1시간 가량 차를 몰아서 온트에서 약 30 킬로 떨어진 홋다군두루에 도착해서 정비소를 찾아갔다. 정비사에게 잠깐 고쳐 달라고 했더니 지금 정비하고 있는 차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데 과연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포기하고 다른 정비소를 찾아 갔더니 주인은 없고 타이어가 망가진 차 3대가 있었다. 누가 타이어를 고치고 있기에 리라가 말을 걸었더니 주인이 아니고 손님인데 급한 김에 자기들이 알아서 시설을 사용해서 타이어를 수선하고 있었다. 어떻게 주인도 없는데 손님이 시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도 몽골의 독특한 문화인 듯하다.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노라니 울란바타르 대학 4학년 재학중인 몽골 아가씨 하나가 한국말로 말을 걸어왔다. 울란바타르 대학은 한국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로 현재 학생수가 삼천명에 달하는 몽골에서 두번째 좋은 학교이며 특히 한국어 학과의 인기가 아주 높다고 한다. 이 아가씨도 한국어학과 출신으로 내년에 서울로 연수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아가씨가 생김새도 영낙 없는 한국 아가씨였고 한국어도 꽤 유창했다. 이 아가씨와 이야기하는 동안 주인이 한껏 목에 힘을 주면서 정비공을 데리고 나타났다. 몽골 남자들은 으시대기를 참 좋아한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어찌나 뻐기고 폼을 잡는지 참 보기가 좋지 않다. 정비소라고 해 보았자 기껏 콤프레서 한 대와 타이어 림 끼우는 시설 밖에 없는 초라한 시설을 가졌는데 꼭 대감님처럼 목에 힘이 들어갔다. 외화내빈의 가식적인 문화가 이 나라를 좀먹은 지가 오래인 듯하다.
리라가 주인에게 부탁해서 3천 뚜구루 (미화 3불 정도)에 타이어를 수선한 후 출발하니 오후 4시 40분이었다. 쓸데없는 일에 1시간 반을 소모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경험이었다. 이렇게 상황을 만났을 때에 현지인을 대동하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몽골에서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반드시 현지인을 대동해야 한다. 중간에 식사도 하고 머물 곳을 찾으려 했으나 마땅한 마을을 만나지 못했다. 그냥 길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밤을 지샐 생각도 했으나 임 선교사의 제의로 무룬까지 강행군하기로 했다. 훗다군두르에서 무룬까지는 200 킬로로 도로형편에 따라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갈 데까지 가기로 했다.
훗다군두르를 지나 1시간여를 달렸는데 누가 차를 세우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멈춰서 보니 타고 가던 타의 타이어가 망가졌는데 스페어 타이어가 없어서 길에 차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이었는데 두 명은 풀 밭 위에 늘어져 있고 네 사람은 차 안에 죽치고 앉아있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인데 우리더러 스페어 타이어를 하나 달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에게 우리 스페어 타이어를 주었다가 아까처럼 타이어가 망가지면 우리는 광야에서 오도가도 못한다는 것이다. 임 선교사가 이 때는 선교사답지 않게 냉정하게 거절하고 길을 재촉했다. 현지인들은 이런 곳에서 상황을 만나도 생존할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외국인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임 선교사에게서 두 가지를 더 배웠다. 첫째는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뿌리치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누가 차를 태워 달라고 해도 거절하라는 것이다.
계속 2시간여를 달리고 나니 경치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목초지만 보았는데 이 평원은 강도 있고 비옥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들판에 녹색 띠처럼 두른 것이 1시간 동안 계속되어서 무언가 보았더니 밀밭이었다. 누군가가 이 곳에 대형 밀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 규모라면 개인이 하는 것은 아니고 큰 기업에서 기획영농을 하는 것이리라. 사실 몽골 땅도 비록 척박한 곳이 많고 겨울이 길기는 하나 지역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농사를 지을 수가 있는 곳이 많다. 단지 몽골인들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방법을 모르는데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타성 때문에 대부분의 야채와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타성이다. 바로 이 타성 때문에 인구가 기껏해야 280만밖에 되지 않는데 식량을 외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의 여름은 저녁 9시까지도 해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야간에도 운전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일단 밤이 되면 노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운전하기가 어려워진다. 속도를 내다가 길이 움푹 파인 곳에 걸리면 타이가 찢어질 수도 있고 샥이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밤에 이런 사고를 당하면 꼼짝없이 들판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 밤중이라 조심해서 운전하노라니 반달이 떠서 평원을 비추는 가운데 좌우로 둘러싼 산들의 모습이 짙은 음영으로 다가왔다. 낮 동안 그리도 푸르고 아름답던 하늘도 어느 새 칠흑의 옷을 입고 나그네를 반겼다. 한밤중 운전대를 잡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평원을 질주하는 맛도 각별했다. 끝간 데 없이 넓은 평원을 혼자서 질주하노라니 내 마음이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내 인생에서 언제 이런 체험을 할 수 있겠는가?
임 선교사와 이야기 꽂도 피우고 함께 노래연습도 하면서 운전하다 보니 어느 새 무룬에 도착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빨리 도착했다. 임 선교사의 시계를 보니 자정이 임박했다. 시내에 들어가서 둘 호텔이란 곳에 여장을 풀었다. 방 하나에 2만 3천 뚜구루 (미화 23불)씩이니까 가격도 괜찮고 잠자리도 깨끗했다. 늦게 도착했음에도 밥과 김 그리고 컵라면에다 삶은 계란까지 꺼내서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니 새벽 2시였다. 내 인생에 잊지 못할 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