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주판 2003년 9월 12일 A15 종교인 칼럼에 실렸던 글을 윤문하여 올리다.)
나의 이야기 (32) 정지 (STOP) – 1996년 사건
플라싱에서 나이약 대학의 한국분교를 맡아 운영하던 1996년 추운 겨울에 일어났던 일이다. 당시 대구에서 유학 왔던 한 청년이 다른 학생의 차를 빌려 타고 가다가 차가 전파되는 사고를 당했다. 그 날 따라 혹한으로 사무실에서 난로를 피우고도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 학생이 사색이 되어서 사무실에 들어왔고, 이 차와 부딪친 차의 주인인 중국인 남자가 난감한 표정을 하고 따라 들어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 학생이 교차로에서 자기 편에만 정지 (STOP) 표지가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달리다가 정지표지 없는 오른 편 길에서 오던 차에게 된통 측면을 받혔던 것이다. 학생의 의료보험도 없었던 상황이고 타고 있던 차도 Liability 만 부보했던 상황이라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학생을 데리고 사고현장에 가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탱크 같던 볼보 승용차의 운전석 쪽이 완전히 짜부라져 있었다. 볼보의 문짝에 있던 굵은 철근 두 개가 받쳐 주지 않았다면 이 학생의 생명은 이미 끝났을 상황이었다. 그래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학생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느라고 하루를 소진했다. 육각형의 작은 경고표지를 무시하고 달리다가 당한 사고였다. 이러한 이 경고표지판 앞에 오면 어떤 차이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순종하지 않으면 이렇게 차끼리 부딪치거나 사람을 칠 경우도 있다. 아무리 신나게 달리던 차도 이 표지판을 보면 무조건 서야 한다.
이는 비단 도로의 표지판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 길에서도 이러한 표지판을 종종 만난다. "완전 정지" (Full Stop)를 뜻하는 것이다. 때로는 불치의 병으로 인생의 완전정지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일단 정지했다가 다시 진행하도록 허락 받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단 정지한 후 삶을 재정비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이러한 경고를 받고서도 고집대로 밀고 나가다 돌이킬 수 없는 완전정지의 신호를 받는 가엾은 분들을 만난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본인이 사업하던 시절 큰 거래선 중 필립이란 분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민 온 사람으로 성품이 온유하고 쾌활하여 만날 적마다 마음이 통하던 좋은 분이었다. 한 가지 단점은 줄담배꾼이었다는 것이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몇 번씩 충고를 하여도 자기 부친은 줄담배를 하시면서도 90이 넘도록 장수하셨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폐가 불편하셔서 의사에게 가셨다가 담배를 끊지 않으면 폐암으로 전이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 정지신호를 받고도 이 분은 담배를 끊지 못하더니 급기야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육척 장신에 260파운드 이상이던 거구가 뼈와 가죽만 남은 처참한 모습으로 관속에 누운 것을 보며 마음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필립처럼 절제하지 못해 죽음을 자초하지 않았음에도 한참 젊은 나이에 암의 선고를 받고 삶을 마감하는 분들도 많이 만났다. 어린 자녀와 한창 남편 목사님을 남겨두고 유방암으로 세상을 하직하신 젊고 아름답고 지혜롭던 사모의 시신 앞에서 "왜"냐고 하나님께 항의한 적도 있지만 하나님은 왜 삶의 완전 정지를 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으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누구나 때가 되면 완전한 정지가 다가온다는 인간의 실존이다. 이 분들과 내가 다른 점은 저들에게는 이 순간이 조금 빨리 왔다는 사실 한가지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인생이 영원한 것이 아니요, 언제 완전정지가 올 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란 사실을 깨닫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보다는 영원의 삶을 대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한 인생이다. 이 짧은 인생은 완전정지 후에 다가올 영원한 삶을 예비하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추수한 곡식을 광에 가득 쌓아두고 한 해를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다짐하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내가 너를 데려가리니 그러면 그토록 양식을 위해 수고한 그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