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7) 카스테라냐, 조개냐 그것이 문제로다 - 1962년 사건

by JintaeKim posted May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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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ella,made_in_nagasaki-city,japan.jpg : 포트리 한담 (139) 카스테라 갚으로 조개 한 상자를

 

 

 

210521

나의 이야기 (17) 카스테라냐 조개냐 그것이 문제로다

 

오늘은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 다녀 온 얘기를 나눌까 해요. 저는 평생 부모님으로부터 용돈도 받은 적이 없고, 소풍 갈 때도 도시락 하나 외에는 받은 적이 없어요. 좌우간 자수성가 훈련은 제대로 받았던 셈이에요. 제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유판조 선생님으로 제가 후에 김천고등학교 시절 제 친구였던 인근이 아빠에요. 이 분이 원래 좀 건달기질이 많으셔서 술도 좋아하시고, 한잔 하심 걸핏하면 남에게 시비를 거셨어요. 5학년 때는 이쁜 처녀선생님이 담임하셨는데, 어째 이번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기신 담임이라 솔직히 첨에는 실망했지요. 그러나, 알고보니 이 분이 보기와는 달리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어요. 그 반에서 제일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 말 잘 듣는 저를 유독 총애하셔서 제일 앞줄 정중앙에 앉히시고, 무슨 문제든 어려운게 있음 저더러 풀어보라고 하시곤 하셨어요. 그럼 재깍 정답을 맞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역시 독일제는 뭐가 달라도 달라, 야들아 진태 좀 본 받아라!”  

 

그럼 저는 우쭐해서 고개를 반듯이 들고 선생님을 바라보곤 했어요. 그땐 아직 겸손이 무엇인지 개념도 없었어요. 그 바람에 “독일제”가 제 별명이 되었어요. 당시만 해도, 독일제하면 최고급 품질과 내구성을 대변했거든요. 

 

그 해 가을이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6학년 학생 전원을 두 분 담임선생님이 인도하셔서 서울과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여비 조로 수학여행비 360원을 부모님께 받아 오라고 하셨어요. 사실 그게 말도 안되는 금액 책정이었어요. 겨우 기차표 값 조금 더 되는건데 안 그럼 갈 수 있는 아이가 별로 없었거든요. 당시는 애들이 다들 거지 비슷했어요. 근데 저는 그것조차도 부모님께 달라고 손을 내밀지 못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쓸 데 없이 철이 들어서 집안사정 어려운 건 너무 잘 알았거든요. 그래서, 학교에서 월사금 가져오래도 절대 부모님께 얘기 않았다가 나중에 된통 혼이 나곤 했어요. 제 기억에 당시 30 여명의 학생이 여행비를 납부해서 여행일정이 확정되었어요. 이제 마감해야 할 날이 다가오는데 제가 수학여행비를 낼 기미가 없자, 유판조 선생님이 저더러 물어보셨어요.  

 

“진태야, 니는 와 돈 안내노. 부모님이 안 주시더나.” 

 

그래, 고개를 푹 떨구고 끄덕끄덕했지요. 그랬더니 아 이 분이 그 날부터 아예 퇴근을 우리 집으로 하셨어요. 선생님이 오셨으니 부모님이 할 수 없이 마루에 모시면 걸터 앉으셔서 끈질기게 부모님을 쪼시는거에요. 

 

“아니, 딴 애는 다 안 가도 야는 가야 합니다. 독일제를 안 딜고 감 말도 안됩니다. 안됨 제 돈으로라도 딜고 갈낍니다.” 

 

그게 근 한 달을 끌었어요. 울 부모님도 끈질기셨지만 선생님의 집념에는 결국 항복하셔서 거금 360원을 내 놓으셨어요. 부모님께 얘기도 못했지만, 제 마음은 엄청 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소풍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엿공장 일을 도우곤 했던 전철이 있었는지라, 저는 아예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 때까지 김천을 벗어날 수 있었던 기회는 딱 한번 아부지 따라 기차 타고 구미에 물엿 한 통 배달했던 기억 밖에 없었어요. 그때 기차를 타고 가는데 아 창밖으로 세상이 휙휙 지나가는 것이 어찌 신기했던지 "언제 다시 기차를 타보나" 했는데, 서울을 간다고 하니까 여행을 떠나기 전 한 달동안 마음이 구름 속을 떠 다녔어요. 드뎌 대망의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이 왔는데, 부모님이 물으세요. 

 

“야, 진태야, 360원이면 차비와 숙박비 다 된다는데 그냥 감 되냐?” 

 

착한 바보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지는 카스테라 하나만 사먹음 되니까 10원만 있음 되요."  

 

그때 10원이면 카스테라 하나 값인데, 그게 제가 정말 사먹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이에요. 학교 앞 가게를 지날 때마다 침만 흘리고 말았거든요. 그래 달랑 10원만 받아서 수학여행을 떠났어요. 사실 다른 집 애들은 다들 수학여행비 정도의 용돈은 가지고 갔어요. 그 때 제 기억에 완행열차를 탔는데, 아 그렇게 사 먹고 싶던 카스테라를 기차 내에서 판매원이 팔더군요. 그걸 사 먹고 싶은 유혹이 내 마음을 계속 두드렸지만, 제 차가운 이성이 이렇게 말해요. 

 

"야, 지금 10원 쓰고 남 빈털털이인데 우짤라 카노. 좀 참아라. 난중에* 집에 가기 전에 사 묵는기 났다."  

 

지는 차가운 이성의 싸나이 아입니까? 꾹 참았지요. 근데, 이래 보니까 다른 애들은 신이 났어요. 지들이 무슨 돈병철이 아들이라꼬, 삶은 계란도 사먹고 뭐 이것저것 군것짓들 신나게 하더군요. 근데 괘씸한 것이, 옆에서 침을 흘리는 날 보고도 먹으라고 권하는 님은 하나도 없었구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음을 달랬지요. 

 

"의리없는 눔들, 난중에 두고 보자." 

 

서울역에 내리니까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해서 어두워질 녁이라 네온싸인들이 켜져 있더군요. 그때 무엇이 제일 제 눈을 놀라게 했는지 아세요? 역전에 드레스미싱 네온사인이 어마무시하게 큰 모양으로 비치는데 야 촌놈 눈에는 그게 그렇게 크고 환상적일 수가 없어요. 근데, 나중에 서울 살며 보니 보잘 것 없더군요. 서울역에서 내려서 우리가 묵을 여관까지 남대문 방향으로 줄을 서서 "하나둘하나둘"하며 오리가족처럼 걸어가는데, 전차가 댕댕하면서 지나 갔어요. 애들이 전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난리가 났어요. 

 

“야 이거 진짜 서울에 왔구나, 시상에 전차구경을 다하네.” 

 

우리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방 하나에 열 명씩 무더기로 들어 가서 묵었는데, 세월이 가고 나서 알고 보니 거기가 바로 그 유명한 윤락가인 양동이었어요. 저는 이렇게 여관에 묵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새롭고 황홀했지요. 그 다음날 일어나 남대문에서 전차도 잠깐 타고, 창경원과 동물원 구경도 했어요. 서울에서 그 외 무엇을 구경했는 지는 기억에 없어요. 

 

그후 인천 자유공원에 가서 맥아더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던 것 같아요. 인천에 간 김에 바다구경한다고, 선생님이 바닷가 갯뻘 있는 데로 인솔해 가셨어요. 거기에 뻘에서 캔 조개를 다라이*에 담아와서 파는 아줌마들이 있더군요. 동무들 중에 몇 사람은 집에 선물로 가지고 가겠다고 조개를 한 무더기씩 사는데 그게 가격이 만만찮았어요. 그걸 쌀을 되는 됫박 같은 것으로 퍼서 파는데 최소량이 200원어치였어요. 저는 가진 돈이 10원 뿐이라 감히 엄두도 못 낸데다가, 그것도 카스테라용이라 눈요기로 만족했지요. 수학여행을 마치고 다시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다들 저녁에 출출하던 참인데 마침 먹을거리를 파는 판매원이 지나가는거에요. 다들 아실거에요. 야간 열차를 타는 재미 중 하나가 군것질하는 거지요. 

 

"드뎌 대망의 카스테라 시대가 내게 왔구나!" 

 

그동안 여관방에서 잘 때 누가 훔쳐 갈까 봐, 희한한 곳에 꼬불쳐 두었던 10원을 꺼내서 카스테라를 하나 샀어요. 근데 어째 좌우사방에서 찌릿찌릿한 시선들이 느껴져요. 아 돌아보니, 주위에 있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침을 흘리며 제 카스테라에 눈독을 들이는 거에요. 그동안 다들 가지고 있던 용돈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빈털털이였기 때문이에요. 제가 좀 뻔뻔해서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요. 외려 그걸 즐기는 고약한 취미가 있어요. 

 

“짜석들 올라올 때는 지들만 묵으면서 약을 올리더니 약 오르지. 야 이거 10원 가지고 폼 잡는 날도 있구나. 아 신나!” 

 

속으로 웅얼거리며 자랑스럽게 카스테라를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동무 하나가 다급하게 고함을 쳐요. 

 

“야, 진태야, 수돕!”

 

“자석이 수돕은 뭔 수돕”하면서 보니까 아 이 녀석이 손에 조개 자루를 들고 내게 내밀어요. 

 

“야, 내 조개하고 바꽈 묵자.” 

 

성경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마음이 팔려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았던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동무의 말을 들은 순간 내 손에 쥔 카스테라와 걔 손에 든 조개 자루 사이를 제 눈알이 수없이 왕복했어요. 당장에 먹고 싶던 카스테라를 먹을 것이냐, 아니면 그것보다 값어치가 20배가 넘는 조개를 택할 것이냐를 두고 참 순간적으로 고민 많이 했어요. 햄릿의 독백이 생각나는 순간이었어요. 

 

"카스테라냐, 조개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래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제가 원래 장사꾼 기질이 있어요. 계산을 해보니 10원짜리 카스테라를 200원짜리 조개와 맞바꾸는 장사에요. 당연히 왕창 남는 장사 아입니까? 제 입은 "카스테라 내꺼" 하는데, 제 이성은 이를 냉정하게 거절했어요. 그래, 카스테라를 주고 조개 자루를 집에 가지고 와서 조개국을 끓여서 온 식구가 실컷 먹었어요. 물론 못 이기는 체하고 몇번 버티다가 바꿨지요.

 

"야, 내 니가 쪼니까 이번만 함 봐 준다. 나중에 엉뚱한 소리 안할끼지?" 

 

그랬더니 녀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개 자루를 내게 버리듯이 주고, 내 생명같은 카스테라를 가져가더니 날름 지 혼자 먹고 말더군요. 

 

"짜석, 빈 말로라도 니도 한 입 묵으라 카면 누가 뭐러 카나." 

 

속으로 웅얼거리며 눈으로만 요기를 했지요. 사실 그걸 엄청 먹고 싶었거든요. 불행하게도 제 카스테라의 꿈은 결국 그해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따지고 보면 제게 조개 보자길 카스테라와 바꿔 먹은 동무는 그걸 인천에서부터 열차까지 들고 오느라 고생만 직사하고 하고, 우리 가족 좋은 일만 했던 셈이에요. 지 돈 주고 사서 내한테 배달만 해 준 셈이지요. 김천은 내륙에 있어서 당시에는 신선한 해물 특히 조개를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 우리 식구가 이렇게 조개국을 끓여 먹은게 처음이었어요. 맛있게 조개국을 드시고 나서 울 누나가 이렇게 말했어요. 

 

“야는 10원만 달라 카더니 시상에 그걸로 온 식구 먹을 조개를 사왔네. 야가 뭐 될라꼬.”  

 

누나가 나를 특히 대견하게 여기신 이유가 있어요. 사실 어릴 때 저를 업어키운 것은 울 누나이거든요. 제가 대학졸업 후 삼성물산에 들어가서 강관수출로 출세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에요. 

 

"아 10원의 가치가 이렇게 바뀔 수도 있구나." 

 

그때 깨달음이 왔던 거에요. 10원으로 200원 어치 조개를 확보하는 장사의 비결 말이에요. 세월이 흘러 15년 후 삼성물산에 입사해서 당시 상사의 불모지였던 강관품목을 받아 2년만에 단독품목으로 미국시장에 1억불을 수출해서 회사에 엄청난 이득을 남겼더니 품목 맡은 지 3년만에 뉴욕지사에 주재원으로 보내 주더군요. 덕분에 주재원으로 있던 중 예수님을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거에요.   

 

*"난중에"은 "나중에"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다라이"는 함석으로 만든 바닥이 넓고 뚜껑이 없는 원통형의 통으로 여자들이 거기에 온갖 것을 담아 머리고 이고 다녔던 용기를 부르는 일본말이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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