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for Jesus 한국어판 (6): 2부 4장 가스펠 타버너클

by 김진태 posted Mar 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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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창공을 향하여!

1881-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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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가스펠 타버너클

심슨은 신약의 패턴에 의거한 교회를 시작했고
심슨의 시도는 성공했다.

1881-1886년

시대적 배경

19세기 말 심슨이 13가 장로교회를 사임한 후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건들이 있다. 첫째, 구세군의 등장과 중생과 성결을 강조한 신학적 흐름이었다. 전술한 대로 1878년 윌리암 부스는 군대조직을 본받은 구세군을 조직했다. 처음에는 런던빈민가에서 시작한 구호사역이었으나 윌리엄 부스의 두 자녀 발링턴과 에반젤린이 뉴욕에 구세군을 창립함으로 뉴욕으로 확대되었다. 구세군이 뉴욕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얻게 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소위 구제와 복음사역을 연계시킨 것이고, 둘째는 요한 웨슬리가 주창한 중생과 성결을 강조한 것이었다.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혈의 공로로 믿는 자에게 임하는 첫 번째 축복이며 성결은 구원받은 자가 죄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 있다는 웨슬리의 소위 "Entire sanctification" (완전 성화)을 도입했다.

둘째, 시대를 풍미한 아름다운 복음성가들의 등장이었다. 당시의 영적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은 이러한 중생과 성결의 신학이라기보다는 아이라 샌키 (1840-1908)와 필립 블리스 (1838-1876)등이 작곡한 아름다운 찬송가들이었다. 아이라 샌키는 무디의 부흥집회마다 찬송가 독창과 찬양인도를 담당함으로 복음성가의 유행을 선도했다. 심슨의 루이빌 시절 부흥집회에서 찬양을 인도했던 블리스는 영국의 프란시스 하버겔 (1836-1879)과 함께 아름다운 복음성가를 작곡하여 복음성가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장님가수 패니 크로스비 (1820-1915)는 무려 2천여 곡의 복음성가를 작곡했으며 그의 복음성가는 모든 사람이 즐겨 부르는 성가가 되었다. 크로스비의 복음성가가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애창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노래의 가사가 우선 단순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곡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곡이다. 둘째, 노래의 주제가 복음적이다: (1)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과; (2)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항복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특권을 향유하라는 것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크로스비의 찬양에는 "주 예수 넓은 품에" (통일 찬송가 476장), "예수 나를 위하여" (144장), "십자가로 가까이" (496장), "오 놀라운 구세주" (446장) 등 다수의 곡이 있다. [크로스비가 작곡한 찬송가중에는 특히 한국교인들이 애창하는 찬송가들이 많다. 위에 든 네 곡 외에도 찬송가 43장, 46장, 163장, 187장, 204장, 219장, 231장, 275장, 295장, 300장, 321장, 323장, 337장, 424장, 434장, 480장, 492장, 501장, 508장 등 19곡이 통일찬송가에 선정되었다. 한번 그의 찬송만 가지고 찬양집회를 시도해 보시라. 엄청난 은혜와 감격이 있을 것을 보장한다. - 역자 주]

셋째, 기존교단의 타락과 새로운 움직임의 등장이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찬양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었지만 이를 입술로 애창하는 성도들간에는 온갖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불행한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대형교단이었던 감리교단과 장로교단은 부흥의 열기를 잃어버리고 차지도 덥지는 않은 무미건조한 죽은 조직으로 전락했고 이들의 사역의 대상도 안정된 중산층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교단 내 일부 뜻 있는 성도들이나 그룹들은 교단을 향하여 다시 부흥의 열정을 되찾자고 부르짖었지만 이들의 부르짖음은 응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넷째, 분리주의 홀리니스 그룹의 등장과 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이었다. 교회사를 통해 우리가 얻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속화되거나 생명을 잃을 때마다 그 촛대를 옮기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믿는 자의 무리를 일으켜서 이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기존교단들이 성령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던 이 시기에 하나님은 소위 "holiness groups" (성결 그룹)을 각 교단마다 일으키셨다. 이들은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 즉 삶 속에서 체험되는 믿음을 주장했다. 이 무브먼트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한 도덕성과 검소한 복장과 아울러서 세상적인 정욕을 금하였다. 당시 이들은 별도의 교단이나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지만 기존 교단들은 이들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점차 소속 교단들이 이들을 냉대하고 배척하자 이들은 함께 뭉치기 시작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이러한 무브먼트의 배경에 사회적 신분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분리주의적 홀리니스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가르침은 주로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2) 케직 사경회는 결정적 위기를 계기로 시작하여 죽는 순간까지 계속 성장하는 성화 (Crisis and Progressive sanctification)에 대해 가르쳤고 이는 주로 보수적인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3) "Liberal Protestantism" (자유주의 개신교 신앙)의 가르침은 개인적 사회적 도덕률을 강조하였고 성화에 대해서도 위기와 변화를 강조하지 않음으로 부유층의 지지를 받았다. [신학과 사회학의 연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현재 미국의 교단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의 교단분포도 사회적 신분에 따라 분류될 수도 있다. 과연 내가 다니는 교회는 이 중 어디에 속하는가, 아니 내가 지향하는 교회상은 과연 어디에 속하는가 한번 상고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이 세 가지가 항상 완전히 분리되어 역사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교회는 중간에 위치할 수도 있다.- 역자 주]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되기를 원하는 무브먼트의 등장이었다. 이러한 분리주의자들의 등장으로 교계는 위기를 맞게 되었지만 이 위기를 극복하여 서로간의 공통분모를 찾아 함께 뭉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바로 나이아가라 컨퍼런스가 그 한 예이다. 이 집회는 미국과 캐나다의 복음주의자들이 서로간의 차이점을 초월하여 믿음의 공동분모를 중심으로 연합하고자 모인 축제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860년대 말에 시작된 성경말씀과 예언을 연구하기 위해 함께 모였던 일련의 여름회합으로 시작되었다. 이 모임은 1883년 나이아가라를 영구적인 집회장소로 확정했다. 이 모임은 일주일간 계속되었으며 이를 주도한 인물들은 당시 복음주의의 지도자격인 목사님들로 아도니람 고든 (1836-1895), 아서 피어슨 (), 제임스 브룩스 (1830-97)등이었다. 집회의 세 가지 초점은 성경연구와 기도와 선교의 필요성강조였다. 나이아가라 컨퍼런스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지만 두 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이후 유사한 성격의 집회결성에 촉매역할을 감당했으며, 둘째는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간에 상호 협력과 연합을 가능하게 함으로 세계 1차 대전 직후 등장한 소위 펀더멘털리스트 무브먼트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와 같이 격동하는 시대에 심슨은 더 이상 시대의 변화를 방관하지 않고 시대의 격류에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던졌다.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오직 예수만을 섬기는 예수의 종 심슨은 이 시대의 조류를 선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바로 성경말씀에 근거한 성도들의 모임을 결성하는 일에 직접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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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은 무엇보다 목회자였다. 심슨은 가정이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듯이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개 교회라는 사실을 믿었다. 심슨은 교회의 존립목적은 세계선교를 성취하는 것이며, 이 목표는 만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성결의 삶을 살 뿐 아니라 합력하기만 한다면 10년 안에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슨은 신약성경은 교회의 본을 우리에게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본 (Divine Pattern)이 있다. 구약의 성막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호렙 산에서 보여주신 본에 따라 지어졌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도 하나님이 주신 본을 가지고 있는 바, 교회는 이 본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 교회의 모든 문제의 이유는 이 본에 따라 교회가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1800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난무했던 모든 이단과 당파주의와 실책도 모두 이에 기인하며 바로 이 때문에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멸망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디바인 패턴의 적용과 뉴욕 스타일

과연 심슨은 이 디바인 패턴을 19세기 대도시 뉴욕에 어떻게 적용했는가? 심슨의 패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free"라는 단어이다. "제가 13가 장로교회를 떠난 이유는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차별이 없이 누구나 환영받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제게 주셨습니다." 루이빌 목회시절 심슨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성전의 자리가 모두 자릿세를 낸 교인의 지정석이어서 자릿세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없었던 것과, 둘째 저소득층이나 흑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휫틀-블리스가 인도한 전도집회가 끝난 후 심슨은 직접 전도집회를 인도했다. 이 전도집회에서 심슨이 제창한 네 가지 자유는 (1) 자릿세로부터의 자유; (2) 입장료로부터의 자유; (3) 옷차림 때문에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4) 가입교인이 아니라고 입장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제가 원하는 교회상은 런던의 대형교회들로서 특히 뉴만 홀이나 스퍼젼 목사의 교회처럼 수천 명의 교인들이 신분과 빈부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모이는 교회입니다."

심슨은 그러면 어떻게 이처럼 자유한 교회를 개척했는가? 심슨의 교회개척전략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처음부터 특정 목표그룹을 설정하고 시작하였다. 그저 구호사역처럼 방향 없이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심슨은 중산층을 대상으로 시작하되 아직도 모교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둘째, 처음부터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교회를 세웠다. 구호단체처럼 외부에서 자금지원이 없으면 안 되는 기관으로 세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것이 중산층을 주로 겨냥했던 이유이고 이러한 자립교회의 정신은 교인들에게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심슨은 처음부터 선교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시작하였다. 교회의 프로그램이든, 활동이든, 조직이든 간에 전도에 목표를 두고 진행되었다. 알버트 톰슨은 이렇게 말했다. "심슨이 만든 조직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세계선교라는 목표를 향하여 약진하는 하나님의 군대였다."

넷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전쟁은 먼저 마음에서 이기고서 시작하는 것이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신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이다. 심슨은 바로 이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였기 때문에 심령 속에 있던 꿈이 현실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무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심슨은 지금까지 자기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비젼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시하신 교회의 본대로 교회를 시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시작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여건은 한심했지만 믿음의 눈으로 현실 저 너머 찬란한 비젼을 바라보는 심슨에게 아무 장애도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투자하는 이도 없고, 자본도 없고, 은행여신한도도 없고, 자신을 도우겠다는 손길조차 아무도 없었지만 심슨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었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재정을 어디서 구하겠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심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사업도 성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항상 투자할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값어치있는 사역이라면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시는 법이다."

시작은 미천하지만

심슨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13가 장로교회에서 사임한지 불과 2주 후인 1881년 11월 20일 13가와 8가 코너에 있는 칼레도니안 클럽 홀에서 회합을 주재했다. 뉴욕에 새로운 영적 무브먼트가 필요함을 역설한 후 심슨은 이 무브먼트에 동감하는 사람들은 11월 23일 다시 만나 함께 기도회를 가질 것을 제의했다. 11월 23일 회합에 참석한 사람의 수는 불과 7명에 지나지 않았다. 춥고 음산하기만 한 댄스홀구석 작은 난로주위에 웅크린 채 이들은 얼은 손으로 성경책을 열고 읽기 시작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슥 4:6, 10). 다시 교회의 담임이 된 심슨은 후일 이렇게 간증했다. 그 때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약하고 소수였음으로 인해 오히려 감사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의뢰했던 이래 성령님은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 겁 없는 8명의 무리들은 대형교회라도 감히 감당키 어려울 교회일정을 짰다. 매일 야간집회와 주일에는 3부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주일오후예배는 앞으로 뉴욕시내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갈 지회(Branch)의 지도자훈련에 치중하기로 했다. 매일 야간집회직전에는 노방전도집회를 가지며 여름에는 매일 야간집회직후 천막집회를 가지도록 계획했다.

심슨은 말했다. "복잡하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범 교단적인 전도 무브먼트는 어디건 필요합니다. 몇 주간 전도집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일년 내내 계속되는 무브먼트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 결신자들이 다시 세상의 구습에 물들지 않고 믿음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들을 한군데로 모아서 양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슨의 전략은 적중했다. 이제까지 기존교회나 기독교 구호단체 어느 쪽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던 소외된 대중들이 이제 자기들을 대상으로 한 심슨의 사역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매일 개최된 노방전도집회와 야간집회마다 이들은 몰려들기 시작했다. 원래 칼레도니안 클럽의 댄스홀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으나 급증한 교인들로 넘쳐서 첫 예배를 드린 지 2개월도 못된 1882년 1월 장소를 이보다 큰 음악학교 강당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음악학교 강당시설도 늘어나는 교인 수를 감당 못해 2주 후인 1월 중순 다시 스타인웨이 강당으로 예배장소를 옮겼다. 그래도 부족하여 3월에는 브로드웨이와 32가 부근의 에비 파크 극장으로 야간집회장소를 옮겼다.

심슨은 예배가 지겨운 예배가 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심슨의 예배의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1) 찬양과 음악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예배를 드렸고; (2) 설교는 가능하면 짧게 하였으며; (3) 헌금을 강요하는 말씀은 절대 삼갔고; (4) 다른 교회나 단체에 대한 험담은 절대로 않았다.

하나님은 많은 교인과 함께 많은 동역자들을 보내주셨다. 아이다씨는 찬양집회와 성가대를 인도하기 위해 브룩클린에서 왔고, 유명한 목사이자 루이빌 시절이래 심슨의 친구인 죠지 펜타코스트 박사는 음악학교 강당에서 1882년 신년예배에서 심슨 대신 설교말씀을 전하였다. 유명한 복음성가 작곡가였던 죠지 스테빈스 (1846-1945)와 그의 아내도 자주 방문하여 봉사했다.

이렇게 되자 급증하는 결신자들을 수용할 교회를 설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82년 2월 10일 35명의 성도들이 신약에 근거한 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심슨의 집에 모였다. 교회헌법은 8개조항만으로 구성되었으며 다 합쳐서 500단어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세 가지 특기할 내용은, 첫째 교회가입요건은 믿음의 고백과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두 가지였고, 둘째 세례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침례를 선호하되 이를 강요하지는 않았고, 셋째 교회의 사명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복음에서 소외된 영혼들을 전도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사역에 있어 재정문제는 우선순위 최하위였다. 심슨은 교회에서 월급을 받지 않았다. 교회에서 월급을 받기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으로 믿었고 자신의 저서에서 나오는 수입 등으로 생활에 충당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교회사역에 헌금하였다. 사역착수비용도 심슨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이러한 심슨의 희생은 사역 시작한 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1882년 여름이 다가오자, 심슨과 성도들은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장소를 모색하였다. 8가와 23가 코너에 위치에 그랜드 오페라 홀이 이들의 필요에 맞아서 이곳을 2년간 집회장소로 사용하였다.

천막집회와 대형집회

또 한가지 이들이 사용한 전도방법은 하기 천막집회였다. 뉴져지의 사업가 한 사람이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천막을 제공했고 다른 한 사람은 천막을 칠 공간을 제공했다. 심슨은 두 사람의 헌물을 즉각 수락하고 모든 집회를 7월 14일 부로 홀에서 천막으로 옮겨 10월 29일까지 계속 천막집회로 대치했다. 심슨과 함께 처음 사역을 시작한 7명중 한 명인 죠셉푸스 풀루스는 금요일 저녁마다 알코홀 금지를 고취하는 집회를 인도했다.

심슨 회중의 끈질긴 전도활동은 대성공이었다. 1년이 지난 1883년 초에는 등록교인수가 7명에서 217명으로 증가했고 주일예배에는 700여명이 참석했다. 1883년 6월경 심슨 회중은 "Gospel Tabernacle"이란 이름으로 법인등록을 하기로 가결했고 1883년 7월 뉴욕주의 허가를 받았다. 7월에는 1882년처럼 천막으로 모든 집회를 옮겼고 예년처럼 빡빡한 일정의 전도집회를 다시 시작했다. 그해 여름이 지난 후 심슨 회중은 주일예배장소를 "Hippodrome"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전신)으로 옮겼다. 1876년 무디-샌키의 대형집회이후 이런 대형집회는 심슨 회중의 집회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되니 메스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제의 청중숫자로 판단할 때 심슨은 무디-샌키와 비견하는 부흥사가 될 것이다." 무디는 이런 비교에 개의치 않는 겸손한 주의 일꾼이었다. 뉴욕방문중 심슨의 설교를 듣고 무디가 친구 피어선 박사에게 한 말을 들어보라. "피어선, 나는 방금 심슨 목사의 설교를 들었네. 심슨 만큼 내 심령에 와 닿는 말씀을 전한 사람은 아직 없었네." 과연 무디와 심슨은 한 시대를 선도할 만한 믿음의 거인들이며 겸비한 하나님의 사역자였음을 이들의 말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다. 나보다 뛰어난 후배를 존경하고 그 성공을 기뻐할 줄 아는 무디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 우리 사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거인중의 거인이었다.

심슨은 모든 부류의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비법을 터득한 설교자였다. 한 편집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심슨은 음유시인이다. 그의 설교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이다. 설교 시 몸짓도 시적이며 열정 그 자체이다. 심슨은 마치 성령의 바람에 흔들리는 한 줄기 갈대처럼 움직이는 시인이다." 그렇다고 심슨의 설교가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만 먹히는 고급설교였다는 것은 아니다. 시적 스타일보다는 직설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노동자들도 심슨의 설교에 동일하게 매료되었다. 건널목 신호수로 일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저 분의 설교라면 24시간동안 들어도 지치지 않겠다." 1883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교회건축부지를 장만하기 위해 심슨 회중은 당시 거금이었던 $13,000.-을 장만해서 변호사를 사서 34가에 있는 대지를 매입하려 했다. 그 변호사는 그 돈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고 결국 그 땅은 다른 펜스테이션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금요 신유은사집회

천막집회도 열매가 많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가스펠 타버너클의 금요집회도 큰 효과를 보았다. 원래는 심슨의 집에서 오후집회로 시작된 이 모임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뉴욕에서 주중에 모이는 집회 중 가장 많은 회중이 모이는 집회가 되었다. 오후시간에 집회를 가진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집회의 성격이 처음에는 성령께 삶을 온전히 바치는 헌신예배로 시작했으나 이와 함께 점차 신유를 두 번째 주제로 하는 집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유집회는 그 성격이 다른 집회와 달라서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몰려오면 안 되는 집회라고 믿었던 심슨이기에 아무나 오기 어려운 금요일 오후시간을 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대거 밀려와서 500명 내지 1000명의 군중이 집회에 참석했다.

심슨의 독립사역초기부터 동역했던 케네스 멕켄지 박사는 신유집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유에 대해 부인만 하였어도 심슨은 기존 교계의 광범위한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타협한다 해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심슨은 이런 타협을 할 사람이 아니었지요. 심슨의 독립사역초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역은 신유사역이었습니다. 바로 이 금요신유집회가 기존 교단과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함께 모을 수 있는 구심점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심슨이 청중을 즐겁게 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은 명백하다. 한편으로는 신유집회를 경시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당시 초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유은사를 사용하여 군중들을 모아 헌금을 걷어들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1883년 초 심슨은 자신의 신유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유사역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신유사역이 개인의 인기나 이익의 재료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신유사역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는 사역이지만 이로 인한 소란을 떨거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해서도 안 된다. 신유사역을 행하는 사역자들은 겸손과 성결을 겸하여 갖춘 자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신유의 복음을 전하는데 거리끼지 않았다. 야고보서 5장 말씀대로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병든 자들을 위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한편, 모든 성도에게 신유의 은사가 주어졌으며 모든 성도가 이를 클레임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심슨 자신도 올드 오챠드 송림 속에서 이 특권을 행사하여 치유하시는 주 예수님을 인격과 육신으로 만났던 것이다. 심슨은 신유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피 값으로 사셨을 뿐 아니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육신의 힘과 생명과 신유를 허락하시되 영적 축복 못지 않게 거저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유의 축복을 받는데 예수 외에 어느 누구의 중보도 필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손을 대는 자들은 다 나음을 입으니라" (마 14:36)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브라카 신유의 집

신유를 원해 심슨의 신유예배에 참석했던 병자들 중에는 아직도 성경적인 기반이 부족해서 먼저 말씀을 통해 영적 준비부터 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신유의 집은 이러한 필요에 부응해서 시작되었다. 세속의 번거로움을 떠난 고요한 수양관에서 병자들은 말씀묵상과 기도할 시간을 가졌고 필요하면 상담도 받을 수 있었다.

신유의 집은 1880년 중반과 후반에 특히 유행했다. 최초의 신유의 집은 1844년 독일의 루터교 목사였던 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모트릴겐과 바드 볼에서 신유의 집을 운영했고 이를 통하여 수백 명의 환자들이 신유를 체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블룸하르트 목사와 비슷한 시기에 도로테아 트루델은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만네도르프에 신유의 집을 세워 운영했다.

영국에서는 1882년에 엘리자베스 백스터 여사가 런던 근교 벳샨에 신유의 집을 세웠다. 바로 이 곳에서 성대이상으로 사역을 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남아프리카의 안드류 머레이 목사가 신유를 체험하였다. 당시 유명한 목사요 집필가였던 안드류 머레이 목사는 벳샨에서 신유를 받고 88세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설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성공회 평신도이던 의사 챨스 컬리스 박사가 1864년경부터 신유사역을 제창하였다. 컬리스 박사는 1870년 도르체스터 하잇트에 결핵환자 요양소를 설립했다. 컬리스 박사는 신유에 관한 글을 다수 집필했고 남아프리카 인 안드류 머레이 목사도 컬리스 박사의 글을 읽고 자신의 성대이상문제를 신유로 해결 받고자 벳샨으로 갔던 것이다. 컬리스 박사의 영향으로 캘소 카터 박사는 신유에 관한 책을 집필하였다. 카터 박사의 저서는 이 방면에 19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책 중 하나였다. 바로 컬리스 박사의 "Old Orchard"신유집회에 심슨이 우연히 참석해서 그 집회를 통해 치유받은 많은 환자들의 간증을 듣게 되었고 이것이 심슨으로 하여금 신유의 체험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캐리 저드 양은 자신의 거주지인 뉴욕 버팔로에 1880년 "Faith Rest Cottage"라고 하는 신유의 집을 열었다. 캐리 저드는 중환으로 여러 달 동안 기동조차 못했던 몸이었다. 저드 양은 코네티컷에 사는 에드워드 믹스여사와 함께 신유날짜를 정해놓고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저드 양은 작정한 날보다 하루 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신유를 체험한 직후 저드 양은 신유의 집을 열었던 것이다.

세계각처에서 시작된 신유의 집 운동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심슨은 자기 사택을 신유의 집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내어놓을 것을 고려했다. 마가렛 심슨 여사는 남편의 의견에 반대했다. 마가렛은 자녀들은 가정에서 양육되어야 하는 것이지 번잡한 신유의 집에서 양육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마가렛의 주장은 옳았다. 토저는 후일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심슨의 자녀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 심슨 목사의 사역 때문에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당한 데 있습니다." 남편의 고집이 꺾이지 않자, 마가렛 여사는 만일 현재의 사택보다 큰 주택이라면 집을 신유의 집으로 겸용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심슨은 이를 위해 기도했고 1883년 초 귈드 씨가 심슨의 새 사택 비용으로 2천불을 헌금함으로 심슨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5월 16일 심슨은 새로 이사한 34가 사택을 "믿음과 신유의 집"으로 헌당했다.

바로 이 신유의 집에 당시 뉴욕의 유명한 사업가인 코우 씨가 중병이 든 육신을 이끌고 찾아왔다. 당시 셀코우 씨는 의사가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2년 이상 살 수 없다고 선고할 정도로 중병이 들었었다. 셀코우 씨는 심슨의 신유의 집에서 신유를 체험한 후 죽는 날까지 32년 동안 가스펠 타버너컬에서 신실한 교인으로 섬겼다. 2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셀코우 씨는 신유의 집을 더 큰 곳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왜냐면 당시의 시설은 급증하는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너무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23가에 적합한 건물을 발견한 셀코우 씨는 이를 구매할 수 있도록 8천불을 헌금했고 이 나머지 은행불입금은 자신이 책임질 것을 약속했다. 1884년 5월 4일 "The Berachah Home" (브라카 신유의 집)이 헌당되었다. 브라카 신유의 집은 16개월후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브라카는 히브리 말로 축복이란 뜻이다.- 역자 주] 그러나 그 16개월간 700여명의 환자들을 수용했다. 물론 상담만 받은 인원을 포함한다면 수천 명에게 혜택을 입혔다.

세계선교의 비젼을 펼치다.

아직도 그랜드 오페라 홀에서 모이던 초창기부터 슨 회중은 하나님이 주신 본을 따라 세워진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해외선교를 향해 그 발자국을 내딛기 시작했다. 심슨은 마태복음 28장 19장의 예수님의 지상명령 특히 너희는 가라는 명령을 가장 직설적으로 적용했다. "만일 내가 국내에서 하는 선교를 위한 사역이 내가 직접 나가서 하는 사역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확실하지 않다면 나는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신다면 나는 어디든지 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주님의 지상 명령에 우리가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심슨의 비젼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선교회의 조직이다. 1883년 3월 심슨 회중은 "세계선교를 위한 선교연합"이란 명칭의 선교회를 조직했다. 이 선교회의 목적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도록 기도하고 준비하는 것이었다.

둘째, 선교의 정보를 교환하고 모든 성도들에게 선교의 비젼을 고취할 잡지를 다시 시작했다. 심슨은 홍보의 위력을 진작부터 깨달았던 선각자였다. 전술한 대로 심슨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선교잡지를 만드는 비젼을 최우선과제로 세우고 1882년 "The Gospel in All Lands" (만천하에 복음을)을 만들어 먼저 홍보에 주력했었다. 심슨은 이와 유사한 월간 간행물인 "The Word, The Work and The World" (말씀과 사역과 세상) 라 명명한 월간잡지를 시작함으로 다시 문서선교에 손을 댄 것이다. 이 잡지는 "The Gospel in All Lands"처럼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선교사역의 모든 정보를 삽화와 사진을 곁들여서 게재할 뿐 아니라 심슨 자신의 글 중 가장 빼어난 글들을 게재했다. 이 월간잡지는 당시 복음주의 교계에 중요한 기사거리와 인물들의 소식을 실었다. 과거 "The Gospel in All Lands"에서 시도했듯이 매 면마다 기발한 삽화를 삽입함으로 당시 기독교 출판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집필에 관한 한 전문가인 토저의 찬사를 들어보자. " 'The Word, The Work and The World' 은 종교계에서 간행한 선교잡지 중 가장 빼어난 잡지였습니다. 기사의 범위도 놀랍게 넓었습니다. 디자인만 보아도 이 잡지의 편집자가 세계를 자신의 교구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심슨이 세계를 품는 선교관을 뚜렷이 드러낸 것은 이 잡지가 처음일 것입니다."

셋째, 선교사 훈련대학의 시작이다. 심슨은 준비되지 않은 선교사가 끼칠 해독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선각자였기에 선교사를 양성할 학교부터 시작하였던 것이다. 1883년은 가스펠 타버너컬이 신유의 집과 선교회의 조직에 이어 또 하나의 사업을 일으킨 중요한 해이다. 1883년 초 심슨은 자신의 잡지에 이렇게 기고했다. "또 하나의 목표는 경건하고 헌신된 젊은이들이 복음의 깃발을 들고 선교지로 나갈 수 있도록 훈련시킬 "Missionary Training School for Christian Evangelists" (선교사 훈련대학)를 시작하는 것이다." 심슨은 1882년 이미 가스펠 타버너컬의 지도자훈련을 위해 교회에서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새로 시작할 선교사 훈련학교는 이미 자신이 운영하던 교회 내 클래스의 연장인 셈이었다. 그 다음 달 잡지에 심슨은 이렇게 기고했다. "선교회원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고 선교에 필요한 재원과 인적자원도 증가하고 있다. 서부에서 한 친구가 선교사 훈련대학기금으로 100불을 보내왔다. 수많은 헌신된 선교사 지망생들이 학교가 시작하면 즉시 등록하려고 고대하고 있다." 심슨의 소위 "Divine Pattern" (하나님이 보여주신 교회상)에 의하면, 선교잡지와 선교회, 각종 교회사역, 선교사 훈련대학은 별개의 기관들이 아니고 서로 유기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야 하며, 이 모든 기관들의 존재목적을 부여하는 교회의 관할 하에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슨과 동역자들은 22개 과목에 달하는 교과과정을 그 해 7월까지 완성했고, 뉴욕시내에 거주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해 숙박시설준비까지 끝내었다. 심슨은 학생 모두가 대도시인 뉴욕에서 직접 도시선교에 종사하고 학교와 관련된 특별한 전도사역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학교근처에 거주하기를 원했다. 선교훈련대학은 1883년 10월 1일 월요일 뉴욕 8가에서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학교로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요건인 교수진과 교과목과 입학요건은 어떠했는가? 첫째, 교수진으로는 심슨 본인과 죠지 미드 목사가 교수로 봉사했고, 강사진으로는 피어선 박사, 죠지 펜타코스트 박사, 아도니람 고든 박사, 제임스 브룩스 박사 등 당시 동부의 내노라하는 복음주의 강사와 목사들을 망라했다. 둘째, 교과과정을 보면 1년만에 성경개관을 끝내게 되어 있었고, 영어, 교회사, 변증학 등 관련과목들을 이수해야 했다. 학과목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성경말씀 전반에 걸쳐 완벽한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전도와 교회사역 등 실무경험을 통해 훈련받을 수 있도록 짜여졌다. 물론 그 외에도 인문계 대학에서 공부하는 신학과 문학과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학생 수는 40명에서 50명 수준이었으며 입학요건은 단 한 가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주의 일만 한다는 것이었다.

첫 졸업식은 1884년 7월 20일 당시 23가에 있던 가스펠 타버너클에서 27명의 졸업생을 대상으로 거행되었다. 이 중 5명의 졸업생들이 가스펠 타버너클의 첫 번째 선교팀으로 콩고로 떠나게 되었고 함께 졸업한 헤리엣 워터베리와 엘렌 그리핀 두 사람은 뉴욕에 남아 심슨을 도와 큰일을 감당하게 된다. 졸업식사에서 피어선 박사는 말했다. "이 선교사훈련대학은 저의 모교회인 베다니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와 함께 19세기 교회가 운영하는 단 두 개의 학교입니다." 모교회인 가스펠 타버너클이 용도에 적합한 건물을 찾아 뉴욕시내곳곳을 전전하였듯이 선교사 훈련학교도 1890년까지 불과 7년 사이에 네 번 이사를 갔으나 결국 모교회가 8가에 정착함에 따라 모교회 건물 옆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실패는 참담했으나

1년간의 훈련 끝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선교에 나서 보니 정작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처음부터 체험하게 된다. 학교에서 1년 훈련받은 것으로 감당하기에는 당시 해외선교의 여건이 너무나 힘들고 위험했던 것이다. 5명의 졸업생으로 구성된 첫 선교 팀이 영국을 경유해서 콩고로 출발할 것은 1884년 11월이었다. 팀 리더인 죤 콘디와 프란시스 게리쉬, 윌리엄 퀘일, 젠슨, 피어선 모두가 가스펠 타버너클 교인들이었다.

리버풀을 떠나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가는 뱃길은 험악하기 그지 없어서 다가올 위험을 예시하는 듯했다. 콩고 강 입구 카빈다 항에 닻을 내린 5명의 선교사들을 맞은 것은 포르투갈 상인들의 사나운 눈길이었다. 상인들은 복음이 아프리카 인들에게 들어가면 자신들의 사업이 망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카빈다에 한시도 머물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잠시 휴식하며 적응할 틈도 없이 온갖 위험이 산재한 내륙으로 출발한 선교 팀은 침례교단의 선교기지까지 50마일의 정글을 도보로 가야 했다. 불행하게도 팀 리더인 죤 콘디가 도중에서 열병에 걸렸다. 퀘일과 피어선 두 사람은 계속 콩고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비비에 이르러 그 곳에 선교기지를 정하도록 임시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콘디의 사망으로 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콘디의 죽음으로 사기를 잃은 동료들은 집에 돌아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교장비를 팔아 버렸다. 게리쉬만이 콩고에 남아 선교할 것을 고집했다. 게리쉬는 모교회 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1888년까지 4년 동안 침례교단의 선교사들과 동역했다. 뉴욕에 돌아오자 게리쉬는 모교회의 친구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돌아온 지 1년이 못 되어 사망하였다. 다른 세 사람은 사람들 앞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참담한 첫 실패에 대해 심슨과 그의 교회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진정한 지도자는 첫 실패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심슨은 이 부분에서도 뛰어난 지도자였다. 첫째, 실패에 대해 특정대상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이 일에 자신도 책임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심슨은 무참히 실패하고 돌아온 첫 선교 팀에 대해 비판적인 말은 거의 입밖에 내지 않았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책임을 돌리는 지도자는 절대로 성공하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둘째, 첫 번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활용하여 선교전략을 수정했다. 무엇보다 심슨은 앞으로 파송할 선교사들은 훨씬 적절한 준비과정을 거친 후에야 파송되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하였다. 실패에 대해 감정적인 대응을 삼가고 냉철하게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앞으로의 사역에 대비하는 자가 현명한 지도자이다. 심슨은 이 부분에서도 본이 되는 지도자였다.

셋째, 첫 실패가 해외선교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지 않도록 더욱 선교에 대한 홍보작업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심슨은 더욱 적극적으로 선교기사를 자신의 잡지에 실었던 것이다. 물론 가스펠 타버너클 선교회는 해외선교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한번 실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였다. 심슨도 가스펠 타버너클도 한번의 실패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현명함을 가졌던 것이다. 왜냐면 선교는 이들의 존립목적이었기 때문에 어떤 희생이 따를지라도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다.

부대 사역

신유의 집과 선교회와 선교사 훈련대학 세 가지 사업은 가스펠 타버너클의 주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사역들이 교회 내 그룹이나 교인 개인에 의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비록 종류는 다양했지만 모든 프로젝트의 근본목적은 영혼구원에 있었다. 심슨은 이 점을 항상 강조했고 성도들은 어떤 종류의 사역에 종사하든 간에 근본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유의했다. 주요한 사역만 열거해 보자. 첫째, 노방전도 팀이다. 노방전도 팀은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골목에서도 부둣가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심지어는 항구에 정박한 선상까지 올라가서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교인들은 주머니를 털어 13가에서 노방전도사역을 시작하기도 했다.

둘째, 여전도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윤락여성 등을 위한 재활시설이다. 여전도 회원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윤락여성들을 위한 모임을 시작해서 시내 곳곳에 이들이 재활 할 수 있는 시설을 설립했다. 사우스 스트릿 미션도 그 중 하나로 적어도 이러한 목적으로 세운 재활시설만 해도 4개가 넘었다. 시드니 휫트모어 여사는 "The Door of Hope Mission" (소망의 문)이라는 재활시설을 열어 버림받은 여인들을 돌보았다.

셋째, 부유한 성도들에 의해 시작된 고아원 등 사회봉사시설이다. 헨리 네일러 부부는 브라카 미션을 설립해고 슐츠 부부는 브라카 고아원을 설립하여 직접 운영했다. 슐츠 부부가 시작한 고아원은 점차 규모가 확대되어 161가에다 방 25개와 수 에이커의 숲을 갖춘 건물로 이사하였다.

넷째, 비영어권 이민자들을 위한 특별예배의 시작이다. 알버트 펑크 목사가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독일어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기독교 연합선교회는 이 책이 출판된 1987년 이래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 중 한 가지는 미국 내 타 문화권 교회들의 증가이다. 현재 기독교 연합선교회 교단 내 타 문화권 교회들의 비중은 상당히 높다. 대부분 타문화권 교회들은 출신국가의 언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면에서 볼 때, 펑크목사가 독일계 이민들을 대상으로 시작했던 독일어 예배는 따지고 보면 우리 한인교회나 다른 타문화권 교회의 예배 패턴의 전신이라고 볼 수 도 있다. - 역자 주] 펑크 목사는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목사하시던 분으로 이후 심슨이 일으킨 선교 무브먼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가스펠 타버너클의 부대사역들을 주로 네 가지로 나누어서 소개했다. 그러나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역이 있었다. 이 모든 사역들은 그 초점이 심슨이 당초에 가졌던 교회의 비젼에 맞추어져서 운영되었다. 그 비젼은, 첫째 바로 재정적으로 자급자족하는 교회를 세우고, 둘째 교인의 구성은 주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며, 셋째 그 목적은 국내이건 국외이건 복음에 소외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둔다는 것이다.

23가 타버너클

가스펠 타버너클의 성장속도는 눈부시게 빨랐다. 1884년이 되자 그 동안 사용하던 그랜드 오페라 홀도 너무 비좁아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Tabernacle (성막) 이란 이름에 걸맞게 자주 이동하였지만 교인들도 이제 자체 성전이 필요한 것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는 23가 병기고를 세 들게 되었는데 이에 얽힌 재미있는 간증이 있다.

2년 전인 1882년에 심슨 목사는 이 건물에 세 들려고 했지만 당시 오베람메르가우 수난극을 공연하려던 극장이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하여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가스펠 타버너클에는 끈질긴 기도의 용사들이 많았다. 한 여성도는 이 건물을 놓고 계속 특별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내용이 흥미롭다. "주 예수여, 극장을 짓는 목수들로 하여금 건물을 개조하되 우리가 교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 용도에 맞추어서 개조하게 하옵소서." 극장주가 이 사실을 알고 진작 건물을 포기했더라면 거금을 손해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막상 7만 불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시설을 극장용으로 개조하고 보니 시 당국에서 이 수난극이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공연을 금지시켜버렸던 것이다. [1884년에 7만 불이면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적어도 200만 불은 되는 거금이다. - 역자 주] 리스계약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극장주는 보수 비용조로 5천불만 내고 이 건물의 리스를 인수해달라고 가스펠 타버너클에 간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5천불도 교회입장으로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심슨은 이 일에 대해 회고했다.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서둘러 건물 리스를 인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건물주는 건물을 경매에 붙여 팔았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특정인사가 건물을 구매할 수 있도록 기도했고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되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건물보수 비용을 한 푼도 안내고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심슨 회중은 1884년 갓 보수를 끝낸 건물에 입주해서 새 건물을 23가 타버너클이라 명명했다. 그 후 2년 동안 심슨 회중은 이 건물을 사용하게 된다.

10월 선교집회

23가 타버너클 2년 동안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10월 선교집회의 시작이다. 선교의 홍보지 역할을 감당했던 "The Word, The Work and The World" 지와 함께 10월 선교집회는 가스펠 타버너클과 심슨의 사역의 범위를 미국전역으로 넓혀 장차 세계적인 선교 무브먼트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0월 선교집회는 당시 유행하던 컨벤션에서 아이디어를 도입한 것이었다. 미국 내에서만 해도 복음주의자들이 교파를 초월해서 모였던 연합행사인 나이아가라 컨벤션과 무디가 주최한 노스필드 컨벤션 등의 대형연합집회가 큰 인기를 끌었다. 심슨도 여러 연합집회에 참석했었지만 특히 심슨에게 감동을 주었던 집회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밀드메이 컨벤션이었다. 심슨은 1883년 잡지 사설을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있다. 이 해가 저물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두 함께 뉴욕에 모여 두 가지를 논의하기를 원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무엇을 원하시는지 상고하고, 둘째 곧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이 긴박하게 요구하는 전도와 선교의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 두 가지는 10월 선교집회의 주제가 되었다.

첫 선교집회는 10월이 아닌 1884년 9월에 가스펠 타버너클에서 개최되었다. 런던에서 온 그래턴 귄네스 박사와 뉴욕의 죤 쿡맨 박사와 헨리 윌슨 박사 주강사였으나 심슨과 다른 목사들도 말씀을 증거하였다.

가스펠 타버너클에서 개최되었던 선교집회는 2차 집회 이후 미국전역의 주요도시로 확산되어 나갔다. 심슨이 후일 10월 선교집회를 뉴욕으로 제한하지 않고 다른 도시로도 확산시키게 된 이면에는 심슨이 영국에서 순회설교를 하며 겪은 체험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1885년 2차 선교집회가 열리기 전, 심슨과 아내 마가렛과 장남 알버트 세 사람은 영국 런던 벳샨에서 개최되었던 "International Conference for Holiness and Healing" (성결과 신유를 위한 국제집회)에 참석하였고, 이 집회가 끝난 후 다른 대의원들과 함께 영국에서 순회설교여행을 했다. 벳샨에서의 집회가 심슨의 마음속에 준 확신이 있었다. 바로 유사한 모임을 순회하며 개최하는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같은 목표를 향해 연합시키는데 최선의 방법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1885년 2차 선교집회는 심슨이 의도했던 대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의 연합을 가져왔다. 주강사만 해도 주요교단을 망라했다. 레인스포드 박사, 헨리 윌슨 박사, 케네스 멕켄지 세 사람은 뉴욕 성공회 출신이었고, 죤 쿡 박사, 스티븐 메릿 목사 두 사람은 감리교회출신이었다. 헨리 피어선은 보스톤 출신, 켈소 카터는 필라델피아 출신, 캐리 저드 양은 버팔로 출신, 브라운 목사는 시카고 출신이었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 중에 장차 심슨이 일으킬 선교 무브먼트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Old Orachard Camp Meeting Association"에 중임을 담당한 인물들로 아이작 루스는 이 모임의 총재였고, 헤즈카이야 체이스는 이 모임의 재단이사였다. 두 사람은 심슨의 10월 선교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돌아갔다. 이 후 개최된 재단이사회에서 두 사람은 심슨을 초빙하여 올드 오챠드에서 이와 유사한 선교집회를 개최할 것을 제의했고 재단은 이를 허가했다. 심슨은 이 기회를 사용하여 자신의 사역의 영역을 확장시켜 미국 전체의 복음주의자들을 전도와 선교의 기치아래 연합시키는 거대한 무브먼트를 일으키는 계기로 사용하였다.

사실은 이미 올드 오챠드에서 초청이 있기 전에 심슨은 이미 미국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선교집회를 준비해놓았었다. 심슨과 다른 강사들은 브룩클린, 필라델피아, 보스톤, 피처버그, 버팔로,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지까지 함께 여행하였다.

모국인 캐나다로 영역을 확장하다.

심슨의 대도시 순회집회는 심슨에게 또 하나의 인연을 더하여 준다. 바로 모국인 캐나다로 사역의 영역을 넓힌 것이다. 심슨이 버팔로에서 집회를 가지는 기간 중 버팔로 출신인 캐리 저드 양은 심슨이 여러 집회에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버팔로에서의 집회가 심슨이 시작된 새로운 무브먼트가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건너가게 되고 캐나다에 강력한 동반자의 세력을 결집하게 되는 교두보가 되었다.

이에 선봉을 섰던 인물은 죤 쌀몬 목사였다.쌀몬은 영국태생으로 14세에 가출하여 선원이 되었다. 선원생활을 하는 동안 쌀몬은 하나님을 만나 사도 바울처럼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만 해도 폭주가에다 복음의 핍박자이던 사람이 완전히 변화하여 타고난 열정을 복음사역에 쏟아 붓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쌀몬은 복음에서 소외된 영혼들을 전도하고 양육하고자 하는 열정을 쏟기에 합당한 교단을 찾아 여러 해 동안 방황하던 중에 심슨을 만나게 되었다. 쌀몬이 기존 교단에서 환영받지 못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쌀몬은 나름대로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신유사역을 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다. 불행히도 쌀몬이 섬기던 교회마다 이 문제에 교리적으로 융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고립되었던 것이다.

1885년 쌀몬 목사가 버팔로에서 심슨을 만났을 당시 쌀몬은 콩팥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다른 질병은 치유하신 주님이 이번 경우는 일부러 치유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마침 쌀몬은 캐리 저드 양이 쓴 신유에 관한 팜플렛을 읽게 되었고 급한 성격대로 당장 저드 양을 만나러 버팔로로 떠날 결심을 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종의 필요를 아시고 신속히 여비를 공급하여 주셨다. 쌀몬은 1885년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심슨의 첫 집회에 맞추어서 버팔로에 도착했다. 심슨 목사는 쌀몬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었고 즉시 치유 받은 쌀몬은 그 자리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쌀몬의 경력은 향후 심슨이 시작할 "Christian Alliance" (기독교 선교회) 무브먼트의 동반자로 가장 적격이었다. 역사학자 린제이 리이놀드는 쌀몬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첫째, 복음적인 성경론을 가졌다. 쌀몬은 어린 시절 장로교회 배경에서 온 성경말씀의 권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둘째, 균형잡힌 구원론을 가졌다. 그는 어린 시절 세상으로 돌아가 방황하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영적 회복의 체험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메니안적 신앙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적 신앙을 겸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전천년 재림설을 믿는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 세례에 관해서는 침례교 교리에 따른 침례를 주장했다. 다섯째, 성결에 관해서는 감리교 배경대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섯째, 교회의 조직에 관해서는 개교회의 독립을 강조하는 조합교회를 주장했다. 일곱째, 신유에 관해서는 보드맨과 심슨으로부터 배운 신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심슨 목사의 신유사역을 통해 극적으로 신유의 체험을 한 경험을 하였다. 여덟째, 극적인 회심의 체험과 감리교 신학을 통해 축적된 복음전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

심슨과 쌀몬의 배경을 비교해보면 이 두 사람이 왜 초대면부터 지기가 되어 평생동안 지기와 동역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만하다. 두 사람은 너무도 닮은꼴이었던 것이다. 쌀몬은 드디어 자신의 꿈에 맞는 영적 집을 찾은 것이었다.

꿈은 자라고

심슨이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집회를 가진 이유가 그저 성결집회와 신유집회를 갖는 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잡지 사설에서 심슨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온 세계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전인적 구원의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 연합하는 'Christian Alliance" (기독교 연합회)를 결성하는데 있습니다. 이 연합회 자체가 우리에게 큰 축복일 뿐 아니라 복음사역에 엄청난 힘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연합회는 기도와 사역을 통한 성도들의 교제의 모임으로 결성될 수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기존 'Evangelical Alliance' (복음주의 연합)와 비슷합니다. 성도들을 이보다 대단위로 연합할 수 있게 하되, 그들이 소속 교단이나 교회를 떠나지 않고서 기독교 연합회에 가입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1887년 결성된 기독교 연합회의 첫 헌법은 심슨이 사설에서 이미 밝힌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심슨의 순회집회는 해가 갈수록 그 규모와 개최장소에 있어 확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닥쳐온 것이 메스콤의 신랄한 공격이었다. 가장 신랄한 공격을 받은 부분은 역시 신유론과 성화론이었다. 그러나 종종 공격거리를 찾으려고 심슨의 집회에 왔다가 사실을 목격하고서 태도를 바꾼 기자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The Michigan Christian Advocate" 지의 기자단이었다. 이들은 사설에서 당초 자신들이 이 집회를 취재하려 갔던 목적은 시비 거리를 찾아 공격하려고 갔었다고 자인했다. 그러나 정작 집회에 참석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목격한 이들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신문은 사설에다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그 집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별난 일일 줄은 몰라도 오늘의 교회가 이렇게 시들은 원인은 바로 이러한 별난 일이 교회에서 발생 않는 데 있다." 사설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여러분의 눈에는 별나게 보일지 몰라도 거기에는 세 가지 기존교회에 결여된 요소들이 있다. 질병대신 건강이 있고, 현실에 만족치 않고 온전한 성결을 추구하는 적극적 자세가 있으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수고가 있다. 거기에 비해 기존교회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절대불가침의 이론과, 능력은 없고 모양만 남은 말라빠진 경건과, 흠잡을 데 없는 소위 정통신학과 병원청구서밖에 없다. 그런데도 왜 심슨의 집회에 대해 불평이 많은가?"

토저는 역시 이 일을 분석하는데도 혜안을 가졌다. 심슨이 많은 종교단체로부터 공격을 받은 또 하나의 주요한 이유는 심슨의 순회집회에서 걷혀진 엄청난 헌금이 주원인이었다고 토저는 꼬집어 말했다. "당시 어떤 교계지도자들은 심슨이 열흘동안에 걷어들인 선교헌금액수가 자신들이 10년이 걸려도 못 미칠 규모였기 때문에 자존심이 극도로 상해서 심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단체가 심슨을 공격했던 것은 아니다. 심슨이 하는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격려와 찬사를 보냈던 단체도 있었다. 심슨의 심오한 성경연구와 빼어난 업적에 대한 감사의 징표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심슨에게 제의했던 대학도 있었다. 그러나 심슨은 이 영예가 동역자들과의 이질감을 초래하고 자신을 교만케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집회마다 새 노래를

심슨이 신약 교회의 본에다 추가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수많은 복음성가를 직접 작곡 작사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언약교회의 전통 속에 양육된 심슨인지라 전통적인 찬송가에 익숙하였다. 그러한 관계로 심슨은 전통적인 찬송가를 예배에 계속 사용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은혜를 끼쳤다. 그러나 루이빌 시절 휫틀-블리스 팀의 부흥집회를 통해, 심슨은 휫틀의 설교도 큰 역사를 발휘했지만, 이보다도 블리스가 부른 복음성가가 얼마나 큰 역사를 하는지를 절실히 체험하였다. 심슨은 자신이 직접 복음성가를 제작하여 설교 때마다 부르게 함으로 이 때 깨달은 복음성가의 위력을 사용하였다. 심슨의 복음성가는 그 날의 설교의 핵심을 요약한 가사에다 누구나 부르기 쉬운 곡조와 신명나는 가락을 붙여 제작하였다. 심슨은 복음성가의 위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복음성가보다 더 위력 있는 사역이 요사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블리스나 샌키나 필립스 등의 복음성가 가수들을 통해 역사 하신 것처럼, 제가 만든 복음성가를 통해서도 수백만의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을 믿습니다."

심슨은 집회마다 자신의 복음성가를 사용하였다. 더러는 곡이 너무 대중가요 같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토저의 반론을 들어보자. "대중가요 같다구요? 맞습니다. 대중의 취향에 맞는 곡이었고 이 때문에 눈쌀을 찌푸리는 율법주의자들도 물론 많았지요. 그러나 심슨은 이에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부러 대중가요 같은 곡조를 택했습니다. 왜냐면 심슨은 대중가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도시선교를 시작했고 바로 이런 대중가요 같은 곡이었기 때문에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심슨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핵심을 담은 복음성가를 함께 부르는 것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했으니 엄청난 수의 성도들이 심슨의 복음성가에 매료되어 가스펠 타버너클을 매주 차고 넘치게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심슨이 작곡했거나 작사한 복음성가는 약 181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대부분이 얼라이언스 성가집인 "Hymns of the Christian Life" 에 수록되었다. 그중 1908년 판은 가장 많은 성가를 담고 있는데 심슨의 복음성가만 해도 117곡을 수록했다. [한국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중에도 심슨의 복음성가가 다수 있다. 통일찬송가에 수록된 찬송가 심슨의 찬송가는 133장, 409장, 456장, 498장, 530장이다.]

심슨은 설교준비를 끝낸 후 설교의 개요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설교내용을 깊이 묵상하여 얻은 시상을 엮어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하니 노래 한 곡 한 곡이 모두 심슨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각오를 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단 노래가 완성되면 우선 솔로이스트나 회중으로 하여금 예배 전에 창작곡을 부르게 해서 사람들이 그 가사와 가락에 익숙하게 한 후, 설교직후에 회중이 함께 부르게 하였고, 예배 후에도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게 함으로, 회중이 설교내용을 확실히 기억하게 만들었다.

당시 얼라이언스 무브먼트는 전도와 선교라는 사명의식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인 연합체였으나 조직 면에서는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느슨한 조직을 함께 묶는 시멘트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심슨의 복음성가였다. 심슨의 복음성가는 그 하나 하나가 심슨이 말씀과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신학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얼라이언스 사람들은 그들이 공유하는 신학을 노래함으로서 그 결속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심슨의 복음성가 작곡을 도왔던 메이 에그뉴 스티븐스는 심슨의 지은 가사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간증했다. "심슨은 수많은 찬송가를 지었지만 어느 것 하나 그 내용이 주옥같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심슨은 자신의 심령 속에서 우러나오는 복음에의 불길을 가사에 담았기 때문에 그가 만든 곡 모두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어느 곡을 만들든지 심슨은 4중 복음의 메시지가 충분하게 담기도록 했습니다. 당시 심슨이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재림의 소망의 메시지가 복음의 최종 클라이맥스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복음성가들이 이를 외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슨은 4중 복음 중에서도 마지막 부분 즉 재림의 소망의 메시지를 특별히 강조해서 어느 곡이든 재림의 소망을 반드시 담도록 했습니다.

심슨은 작곡이나 화성학 등의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사람이라 본인이 직접 작곡했던 초기 성가들 중에는 부르기에 거북한 곡도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심슨은 후일 캘소 카터, 루이스 쉐퍼드, 메이 에그뉴 스티븐스처럼 음악을 전공한 분들이나 딸 마가렛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심슨 박사의 딸 마가렛의 말을 들어보자. "아빠가 일단 설교준비를 끝낸 후 이에 맞는 가사가 머리에 떠오르면 저를 부르시곤 했지요. '마가렛, 내일 설교할 내용에 맞는 가사가 준비되었으니 피아노 앞에서 만나자.' 저희 부녀는 피아노 앞에서 아빠가 만족하실 때까지 함께 곡을 다듬었지요. 어떤 때는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지요. '마가렛, 이것 좀 봐.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부분은 도대체 방법이 없어. 어찌됐던 내가 원하는 것은 이대로 해야 하는데 말이야.' 크레센도로 부르기를 원하는 부분은 아빠가 직접 노래로 시범을 보여주셨는데 그 음성이 동네사람들이 다 들을 만큼 컸어요. 어느 부분에 쉼표를 도입하고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하는지 하나 하나 지적해 주셨어요. 제가 알아들은 것 같으면 만면에 희색을 띄시고 환성을 지르셨지요. '마가렛, 바로 그거야. 참 잘되었어.' "

워낙 아마추어의 작곡이다 보니 가사의 질에 비해 복음성가의 음악의 질이 많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어떤 곡은 도저히 노래로 부르기가 어려운 곡도 있어서 회중이 찬양하다가 헤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곡들은 나중에 심슨 찬양집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통일찬송가 133장 "어저께나 오늘이나"와 "To the Regions Beyond" (미답의 선교지를 향하여)같은 곡처럼 오늘날도 그 인기가 계속되는 곡들도 많이 있다. 왕왕 심슨의 음악의 질에 대해 비판적인 토저도 심슨의 노래의 심오한 깊이에 대해 인정하였다. "심슨의 곡이 음악성이 부족하다고 이렇게 비판을 했지만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제 삶의 어느 하루도 심슨이 쓴 찬양을 부르며 은혜 받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심슨의 찬양은 제 영혼의 양식이요, 하나님을 향한 제 간구의 표현입니다. 세상에 좋은 찬양이 많지만 이렇게 제 영혼을 두드리는 찬양은 없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번 장에서는 가스펠 타버너클에서 심슨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본대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떻게 사역했는지에 대해 상고했다. 세 가지로 이 장에서 다룬 심슨의 사역을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수한 사역들이 전개되었지만 어느 것 하나 방향감각 없이 전개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선교회, 선교사 훈련대학, 브라카 신유의 집, 금요 신유은사집회, 하기 천막집회, 10월 선교집회 등 다양한 사역들이 바로 한 가지 목표 즉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둘째, 국내선교와 국외선교에 대한 갈등도 없었고 전도활동과 구제활동에 대한 갈등도 없었다. 교회의 부분 부분이 대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발전을 거듭하였다.

셋째, 전술한 대로 1885년 10월 집회가 계기가 되어 심슨의 도시선교와 세계선교의 비젼은 나래를 펴고 미국의 주요도시로 확산되어 나갔다. 올드 오챠드로 컨벤션을 유치해달라는 두 사람의 초청은 향후 심슨의 무브먼트에 새 장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올드 오챠드는 심슨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고 심슨도 올드 오챠드에서 새 역사의 장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음 장은 올드 오챠드 컨벤션으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