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사역의 사례연구: 알버트 심슨

by 김진태 posted Jul 1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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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사역의 사례연구: 알버트 심슨
(All for Jesus 3장의 내용에 근거하여 김 진태 목사가 번역 정리하다.)

1. 심슨의 신유체험

1) 사망선고

심슨의 건강악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는 선교잡지 "만천하에 복음을"을 마감일에 쫓겨서 편집하느라 휴식할 여유도 없이 무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타고난 연약한 육신이 심슨의 열화같은 성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데 있었다. 거기에다 만사에 최선만 추구하는 완전주의자였기에 목회, 설교준비, 노방설교, 선교잡지 네 가지 격무를 한치의 착오도 없이 철저히 수행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무리가 아닌 일이 없었다.

교인만 해도 수백 명이었는데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정을 모두 심방하며 살뜰히 돌보았고 설교준비의 과정도 성경연구와 예화준비와 원고작성까지 완벽을 기했다. 거기에다 소외된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뉴욕의 빈민가를 찾아다니며 노방설교로 이들을 전도하고 양육까지 하였으니 애초부터 병골로 태어난 육신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소치라 하겠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무리한 몸이 선교잡지를 제작하느라 완전히 망가지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의학수준은 심슨의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후일 심슨은 자신의 체험에 대해 약장(My Medicine Chest)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전하였다. "처음에는 대중요법으로 시작해서 동종요법으로 나중에는 약초의까지 찾아갔습니다. 백방이 무효라 할 수 없이 당시 특허 난 신종 약은 무엇이든 시도했습니다. 제 연약한 심장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한 주머니에는 암모니아 병을 다른 한 주머니에는 마로니에 열매를 넣어 가지고 다녔지요. 어느 고산지대주민이 제게 알려주기를 마로니에 열매가 제 심장문제의 원인인 관절염에 즉효라고 했기 때문이었지요. 당시 저는 신경질적이고 격정적이었지요. 도시 안정할 줄을 몰랐습니다. 제 심장문제 중 하나는 제가 흥분하기 잘해서 제물에 기진하는 것이었지요. 강장제도 먹어 보고, 키니네, 철분, 차아인산염 등 복용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일단 관절염증상이 제 내부에 발병하면 의사는 외부에 염증을 유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일종의 반대자극제인 셈이었지요."

뉴욕으로 온지 1년이 채 못되어 심슨의 건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도 쓰러진 경험이 있었고 헤밀턴 사역 때도 건강이 무너져 수개월간 사역을 중단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그 차원이 달랐다. 심슨의 상태를 진단한 당시 뉴욕의 유명한 심장명 전문의는 치료불능이라고 선언했다. 의사선생님의 진단은 가뜩이나 쇠약해진 심슨의 육신과 신경에다 정신적인 충격까지 더했다. 섬기던 교회에서 휴가를 얻어 심슨은 사라토가 스프링스로 가서 휴식을 취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심슨은 후일 고백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2) 하나님의 신유의 역사

우리의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을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심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절망에 사로잡힌 심슨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주시는 것으로 그 위대한 신유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먼저 하나님은 찬양을 통해서 심슨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주심으로 역사를 시작하셨다. 사라토가 스프링스 휴가기간 중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심슨은 우연히 어느 전도집회장소를 지나갔다. 그런데 그 곳에서 들려나오는 흑인 찬양단의 찬양이 절망의 심연에 빠졌던 그의 마음에 소망의 빛을 던져주었다. "나의 예수님은 만주의 주시네. 이 세상 누구도 주님처럼 능력있는 분 없네."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심슨은 이제까지 자신의 심령을 짓누르고 있던 절망의 구름이 걷히고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꼈다.

둘째는 다른 이들의 간증을 접하게 하심으로 역사하셨다. 신유의 본격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1881년 7월말이나 8월초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소개의 글에서 언급한 컬리스 박사의 집회였다. 당시 심슨은 가족과 함께 메인 주에 있는 올드 오챠드(Old Orchard)에서 휴가 중이었다. 올드 오챠드는 해변 휴양지로 당시 많은 대형집회가 개최되던 장소였다. 지칠 대로 지친 심슨인지라 휴가기간 중에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하기를 원했지만 종종 캠프장에서 열린 전도집회에 참석하곤 했다. 챨스 컬리스 박사가 마침 그 곳에서 신유간증집회를 인도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인도였을 것이다. 컬리스 박사는 보스턴에서 의사로 일하며 결핵요양원을 운영했던 분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컬리스 박사는 환자를 의술로 치료하는 한편 하나님께 환자를 치료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회생의 가망이 전혀 없던 환자들이 컬리스 박사의 기도를 받고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이에 고무된 컬리스 박사는 신유에 관한 성경말씀을 연구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컬리스 박사는 의사로서 일하는 한편 신유사역을 시작했다. 마침 심슨이 참석한 올드 오챠드 집회가 컬리스 박사가 인도한 신유집회였고 200명에 달하는 환자들이 신유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말씀을 통해 검정케 하심으로 역사하셨다. 심슨은 후일 컬리스 박사의 신유집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중 진짜 신유의 간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었지요. 그러나 사실 대부분 간증은 제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유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라면 이는 정말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방에 가서 성경말씀을 펼쳐들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신유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이라면 인정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잊어버리자. 진실이라면 나는 신유를 내 것으로 클레임할 것이다. 설사 이로 인해 무슨 결과가 오든 상관치 않을 것이다."

넷째는 성령을 통해서 확인시키심으로 역사하셨다. 심슨은 해변에 돌출한 바위 위에 앉아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무심히 파도를 내려다 보던 심슨의 눈에 파도를 타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해초조각이 띄었다. 한순간 파도가 해변으로 해초조각을 밀어 부쳐다 놓으면 바다의 위협에서 구원받은 것 같았지만 다시 파도가 해변을 휩쓸고 나가면 속절없이 바다가운데로 끌려가는 해초조각을 내려다보는 심슨의 마음에 이 해초더미가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해초조각의 신세에 동정이 간 심슨은 속절없이 부유하는 이 작은 해초조각을 육지로 가져다 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 물가로 내려가 해초조각을 줏어서 더 이상 파도가 닫지 않는 육지로 가져다 놓았다. 해초조각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심슨의 심령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 작은 해초조각이 바로 너란다. 너도 이 해초처럼 육지로 올라오려고 무한히 애썼지만 정작 육지에 닿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파도가 너를 절망의 바다로 다시 휩쓸어가곤 했던 것이다. 나는 네가 그렇게 혼자 힘으로 발버둥치고 있는 동안 줄곧 너를 들어서 육지로 옮기려고 했단다. 그러나 여태까지 너는 내가 너를 도울 여지를 허락하지 않고 살아왔단다."

다섯 번째는 심슨이 신유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께 서약하는 단계였다. 일단 마음을 굳힌 심슨은 신유의 복음이 성경말씀에 기록된 진리임을 믿고 이를 자기의 것으로 클레임하겠다고 결심했다. "제 소신은 성경에 기록된 어떤 가르침도 제 삶을 통해서 확실히 입증하지 않고 단순히 이론으로만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요."

심슨은 Old Orchard의 송림에 들어가 하늘을 향해 오른 손을 들어 하나님께 세 가지 영원한 서약을 드렸다: (1) 신유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부분임을 무조건 인정할 것을 서약하였다. (2) 주 예수님이 자신에게 신유와 건강을 주셨다는 사실을 무조건 인정하겠다고 서약하였다. (3) 자신에게 하나님이 허락한 신유의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축복을 위해서, 사용할 것임을 서약하였다. 하나님께 세 가지 서약을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심슨은 이제 새 사람이 된 것을 느꼈다. "불과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제게 무엇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내 영혼의 구석구석이 하나님의 임재를 따갑도록 느끼고 있었습니다."

3) 검증단계: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신유의 체험은 그저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시험을 거쳐서 자신의 신유를 믿는 증거를 보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신유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시험은 금새 닥쳐왔다.

첫 번째 시험은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자신의 신유의 체험을 세상에 간증하는 것이었다. 그 주말 심슨은 뉴헴프셔 주의 인터베일 북쪽에 있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예정이었다. 하나님께 서약한 대로 심슨은 이 집회에서 신유의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과거처럼 일반설교를 하고 말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그날 밤 심슨은 호텔에서 열린 집회에서 신유에 대해 간증함으로 설교 때의 실수를 만회했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시험은 다음날 닥쳐왔다.

바로 두 번째 시험으로 교인들이 해발 3천 피트의 키르사지산 등정에 초청한 것이다. 당시 심슨의 심장은 극도로 쇄약해서 완만한 계단도 오르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이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자신을 치료하신 것을 믿지 않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행위였다. 심슨은 결국 초청을 수락하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첫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심슨은 밀려오는 고통에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아 졸도할 뻔했다. 그러나 심슨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인고의 걸음을 떼어놓았다. 등산을 계속하며 심슨은 자신을 주장하는 능력의 임재를 느꼈다. 바로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임재를 느낀 것이다. 심슨은 주님의 약속대로 그 능력을 자기 것으로 클레임했던 것이다. 후일 심슨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간증했다. "키르사지산 정상에 올라선 순간의 기분은 마치 두려움과 질병의 세상을 발아래 두고 천국문 앞에 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시험이 심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세 번 째 시험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의 생사가 걸린 가장 어려운 시험이 닥쳐왔다. 휴가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세살난 마가렛이 디프테리아에 걸렸던 것이다. 심슨의 아내는 의사를 불러야 한다고 고집했다. 왜냐면 아내는 사랑하던 아들 멜빌 제닝스도 세살 때 디프테리아로 잃은 경험이 있었기에 마가렛마저 같은 병으로 죽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심슨은 우직하게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후일 이 일에 대해 간증했다. "그 밤 어린 마가렛의 목젖은 흰눈처럼 하얗게 변했고 온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 저는 어린 마가렛을 눕혀놓고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만일 그 밤에 마가렛의 병이 떠나가지 않으면 마가렛은 생명을 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면 아내를 무슨 낯으로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내의 분노를 감당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밤 떨리는 손으로 마가렛의 이마에 기름을 바르며 예수 이름의 능력을 클레임했습니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마가렛에게는 차도가 없었고 엄청난 불안이 제 심령을 억눌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속히 치유해달라고 간절히 외쳤습니다. 드디어 아침이 왔습니다. 다행히 마가렛의 목젖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일어나 놀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애기 엄마가 그후 저를 바라보던 그 눈길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 이후 아내는 한번도 의사를 부르자고 제게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4) 신유로 인한 축복과 핍박

심슨의 신유의 체험은 심슨에게 찾아온 세 번째 위기였다. 첫 번째는 고등학교 시절 겪었던 구원의 확신이었고 두 번째는 루이빌 시절 겪었던 성결의 체험이었다. 신유의 체험은 이 후 30년간의 심슨의 삶과 사역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심슨이 후반 반생을 통해 성취한 사역의 규모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심슨 만큼 큰 일을 감당한 사람은 사도 바울과 요한 웨슬리 외에는 없었읍니다."

당시 심장에 있어 권위자였던 의사조차 가망 없는 상태라고 포기했던 심슨이 신유의 체험을 한지 4년이 지난 후 심슨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신 능력의 근원에 대해 간증하였다. 당시 심슨이 감당하던 직무만 해도 네 가지가 있었다: (1) 큰 선교잡지의 편집인겸 주필이었고; (2) 교회의 담임목사로 매일 야간집회와 주일 3부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였고; (3) 수백 명의 병자들이 와서 치료받던 신유의 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고; (4) 선교사 양성을 위해 세운 선교사 훈련대학(Missionary Training College)을 운영하고 있었다.

심슨 본인과 딸 마가렛이 신유를 받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뉴욕에 퍼졌다. 그 결과 심슨은 두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심슨을 에워싸고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병자들의 문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또 돌팔이 신유꾼이 나타났다고 심슨을 조롱하고 악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문제였다. 참 못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심슨이 질병으로 고통하며 사역하던 시절에는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심슨이 강건하고 활발하게 사역에 임하자 심슨의 사역과 그 동기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슨은 이들의 공격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신유의 체험에 대해 변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서 이를 인정받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신유의 은사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후일 심슨이 교단을 떠나 별도의 무브먼트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신유사역이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심슨은 자신의 가르침에서 한번도 신유가 중생이나 성결보다 앞서게 한 적은 없었다. 신유의 체험이 가져온 가장 큰 고통은 주위에서 고립된 것이었다. 물론 심슨은 성결의 체험을 했을 때도 동일한 체험을 했었다. 그렇다고 당시 그 분들이 심슨의 변화에 대해 적개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심슨의 체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슨과 이들과의 영적 괴리는 더욱 심화되어갔다. 왜냐하면 심슨의 영적 깊이가 더욱 깊어갈수록 이들은 심슨을 감히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슨이 신유의 체험을 한 후에도 심슨은 친구들과 주위사람들에게서 고립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부활의 주님으로 발견했습니다. 그의 성령께서 나의 영에 역사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나의 육신에 역사하심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육신에 부활의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 것을 깨달았을 바로 그 때에 저는 다시금 엄청난 고독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랜 지기들이 다 저를 버린 것 같았습니다. 몇 달 동안이나 홀로 무인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토록 제가 사랑하던 수백, 수천 명의 동역자들로부터 고립된 것 같았습니다. 그 분들과의 괴리가 어찌 심하였던지 그 분들이 과거 일면식도 없던 분들처럼 생경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핍박과 고난도 심슨으로 하여금 신유의 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멀리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은 이제 심슨의 육신의 건강과 생명의 근원이심을 확실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심슨의 신유는 그저 자신의 심장병 치유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심슨의 신유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매일 허락하신 건강과 체력을 포함한 것이었다.

2. 신유사역

1) 금요집회

전술한 대로 심슨이 교단을 떠나 가스펠 타버너클을 시작했을 때 신유사역이 전도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가스펠 타버너클의 금요집회는 전도집회 못지 않게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었다. 원래는 심슨의 집에서 오후집회로 시작된 이 모임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뉴욕에서 주중에 모이는 집회 중 가장 많은 회중이 모이는 집회가 되었다. 오후시간에 집회를 가진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집회의 성격이 처음에는 성령께 삶을 온전히 바치는 헌신예배로 시작했으나 이와 함께 점차 신유를 두 번째 주제로 하는 집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유집회는 그 성격이 다른 집회와 달라서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몰려오면 안 되는 집회라고 믿었던 심슨이기에 아무나 오기 어려운 금요일 오후시간을 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은 대거 밀려와서 500명 내지 1000명의 군중이 집회에 참석했다.

심슨의 독립사역초기부터 동역했던 케네스 멕켄지 박사는 신유집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유에 대해 부인만 하였어도 심슨은 기존 교계의 광범위한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타협한다 해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심슨은 이런 타협을 할 사람이 아니었지요. 심슨의 독립사역초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역은 신유사역이었습니다. 바로 이 금요신유집회가 기존 교단과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함께 모을 수 있는 구심점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심슨이 청중을 즐겁게 하는 공연자가 아니었던 사실은 명백하다. 한편으로는 신유집회를 경시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당시 초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유은사를 사용하여 군중들을 모아 헌금을 걷어들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1883년 초 심슨은 자신의 신유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유사역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사역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신유사역이 개인의 인기나 이익의 재료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신유사역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는 사역이지만 이로 인한 소란을 떨거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해서도 안 된다. 신유사역을 행하는 사역자들은 겸손과 성결을 겸하여 갖춘 자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신유의 복음을 전하는데 거리끼지 않았다. 야고보서 5장 말씀대로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병든 자들을 위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한편, 모든 성도에게 신유의 은사가 주어졌으며 모든 성도가 이를 클레임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심슨 자신도 올드 오챠드 송림 속에서 이 특권을 행사하여 치유하시는 주 예수님을 인격과 육신으로 만났던 것이다. 심슨은 신유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피 값으로 사셨을 뿐 아니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육신의 힘과 생명과 신유를 허락하시되 다른 모든 영적 축복처럼 거저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외에 어느 누구의 중보도 필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손을 대는 자들은 다 나음을 입으니라" (마 14:36) 이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2) 신유의 집

신유를 원해 심슨의 신유예배에 참석했던 병자들 중에는 아직도 성경적인 기반이 부족해서 먼저 말씀을 통해 영적 준비부터 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신유의 집은 이러한 필요에 부응해서 시작되었다. 세속의 번거로움을 떠난 고요한 수양관에서 병자들은 말씀묵상과 기도할 시간을 가졌고 필요하면 상담도 받을 수 있었다.

신유의 집은 1880년 중반과 후반에 특히 유행했다. 최초의 신유의 집은 1844년 독일의 루터교 목사였던 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모트릴겐과 바드 볼에서 신유의 집을 운영했고 이를 통하여 수백 명의 환자들이 신유를 체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블룸하르트 목사와 비슷한 시기에 도로테아 트루델은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만네도르프에 신유의 집을 세워 운영했다.

영국에서는 1882년에 엘리자베스 백스터 여사가 런던 근교 벳샨에 신유의 집을 세웠다. 바로 이 곳에서 성대이상으로 사역을 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았던 남아프리카의 안드류 머레이 목사가 신유를 체험하였다. 당시 유명한 목사요 집필가였던 안드류 머레이 목사는 벳샨에서 신유를 받고 88세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설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성공회 평신도이던 의사 챨스 컬리스 박사가 1864년경부터 신유사역을 제창하였다. 컬리스 박사는 1870년 도르체스터 하잇트에 결핵환자 요양소를 설립했다. 컬리스 박사는 신유에 관한 글을 다수 집필했고 안드류 머레이 목사도 컬리스 박사의 글을 읽고 자신의 성대이상문제를 신유로 해결 받고자 벳샨으로 갔던 것이다. 컬리스 박사의 영향으로 캘소 카터 박사는 신유에 관한 책을 집필하였다. 카터 박사의 저서는 이 방면에 19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책 중 하나였다. 바로 컬리스 박사의 올드 오챠드(Old Orchard) 신유집회에 심슨이 우연히 참석해서 그 집회를 통해 치유받은 많은 환자들의 간증을 듣게 되었고 이것이 심슨으로 하여금 신유의 체험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캐리 저드 양은 자신의 거주지인 뉴욕 버팔로에 1880년 "믿음과 안식의 집"(Faith Rest Cottage)란 신유의 집을 열었다. 캐리 저드는 중환으로 여러 달 동안 기동조차 못했던 몸이었다. 저드 양은 코네티컷에 사는 에드워드 믹스여사와 함께 신유날짜를 정해놓고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저드 양은 작정한 날보다 하루 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신유를 체험한 직후 저드 양은 신유의 집을 열었던 것이다.

세계각처에서 시작된 신유의 집 운동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심슨은 자기 사택을 신유의 집 용도로 쓸 수 있도록 내어놓을 것을 고려했다. 마가렛 심슨 여사는 남편의 의견에 반대했다. 마가렛은 자녀들은 가정에서 양육되어야 하는 것이지 번잡한 신유의 집에서 양육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마가렛의 주장은 옳았다. 토저는 후일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심슨의 자녀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 심슨 목사의 사역 때문에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당한 데 있습니다." 남편의 고집이 꺾이지 않자, 마가렛 여사는 만일 현재의 사택보다 큰 주택이라면 집을 신유의 집으로 겸용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심슨은 이를 위해 기도했고 1883년 초 귈드 씨가 심슨의 새 사택 비용으로 2천불을 헌금함으로 심슨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5월 16일 심슨은 새로 이사한 34가 사택을 "믿음과 신유의 집"으로 헌당했다.

바로 이 신유의 집에 당시 뉴욕의 유명한 사업가인 셀코우 씨가 중병이 든 육신을 이끌고 찾아왔다. 당시 셀코우 씨는 의사가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2년 이상 살 수 없다고 선고할 정도로 중병이 들었었다. 셀코우 씨는 심슨의 신유의 집에서 신유를 체험한 후 죽는 날까지 32년 동안 가스펠 타버너컬에서 신실한 교인으로 섬겼다. 2년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셀코우 씨는 신유의 집을 더 큰 곳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왜냐면 당시의 시설은 급증하는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너무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마침 23가에 적합한 건물을 발견한 셀코우 씨는 이를 구매할 수 있도록 8천불을 헌금했고 나머지 은행불입금도 자신이 책임질 것을 약속했다. 1884년 5월 4일 브라카 신유의 집 (Barachah Healing Home)이 헌당되었다. 브라카 신유의 집은 16개월후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까지 700여명의 환자들을 수용했다. [브라카는 히브리 말로 축복이란 뜻이다.- 역자 주] 그러나 그 16개월간 물론 상담만 받은 인원을 포함한다면 수천 명에게 혜택을 입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