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7일 선교일지 “울란바타르의 하루”

by Jintae Kim posted Jul 2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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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7 선교일지 “울란바타르의 하루”

 

 

울란바타르에서 밤을 지내고 눈을 뜨니 곳도 중국 동북부처럼  5 밖에 안되었는데도 밖이 훤했다. 창밖을 보니 몽골인들의 5대영산 하나인 보그드 산봉이 앞에 놓여있다. 보그드란 말은 허리라는 뜻이다. 울란바타르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라 산들이 지붕을 이룬 게르”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이동식 천막집)같다고나 할까? 울란바토르 자체가 해발 1351 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수도인데 위에 덤으로 높이 하늘로 치솟아 있다. 아침운동 삼아 아파트 밖에 나가서 바퀴 돌면서 운동을 하는데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하늘은 청명하고 높아서 눈이 시리고 공기는 선선하여 피부를 간질으니 또한 즐겁구나.  1 내내 이런 날씨라면 얼마나 좋을까? 고지대라 처음 오는 사람들은 산소결핍과 기압차이로 적응에 애로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1 가장 날씨가 좋은 때에 왔기에 다행이다.

얘기를 들으니 울란바타르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겨울에는 난방용 보일러에서 뿜어대는 매연이 시가지를 덮고 있어 호흡곤란을 유발한다고 했다 . 비단 겨울 뿐만이 아니고 여름에도 매연이 심각하여 오늘은 특별히 예외라고 했다. 일단 선교사들이 몽골에 도착하면 곳에서 언어와 현지적응훈련을 하기 때문에 보통 2 이상씩 머물게 되는데 제일 심각한 애로가 끔찍한 대기오염이라 했다. 김재호 선교사와 임병철 선교사도 처음 울란바타르에서 호흡기 장애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선교사가 다르항으로 일찍 옮겨온 것도 호흡기 장애로 장기간 고생을 하다가 견딜 없었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표현을 빌리면 죽을 했다고 하니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울란바타르라는 말은  붉다는 뜻의 울란 영웅이란 뜻의 바타르 합성어로 인민혁명의 영웅인 수흐바타르 장군을 기념해서 1921 이름 지었다.  아마 수흐바타르의 머리가 붉었나 보다. 몽골인들은 영웅을 좋아해서 바타르 들어간 합성어를 이름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현임 대통령의 이름도 앵흐바타르이다. 몽골 총인구의 40% 밀집되어 있는 울란바타르이지만 규모는 중국의 군소도시보다도 작고 지저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울란바타르의 사역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몽골 정부의 정책이 울란바타르에 인구를 집중시켜 몽골 산업화의 근간을 삼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곳에 밀집할 도시 군중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 선교정책의 골자가 되어야 것이다.

사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의 정정이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몽골의 경우 지금 상황은 불안하다. 그래도 공산당 정권이 철권통치를 왔기 때문에 나라가 어렵지만 안정되고 선교사가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몽골에는 월드 비전 등의 수많은 기독교계 NGO 들이 들어와서 봉사활동을 통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공산당 정권은 이들이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것인 알고 있지만 그들의 활동이 몽골인들에게 유익한 것을 알기 때문에 묵인해 주고 있다. 우리 교단도 교단소속 구호단체인 CAMA 명목으로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 교회는 현지인들의 이름으로 등록이 가능하며 일단 교회를 등록하면 교회 하나당 1가족의 선교사 비자를 받을 있다. 비록 땅은 국가의 것이지만 건물은 외국인에게도 소유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우리 선교부도 이곳에 아파트를 다섯 사서 사무실과 거주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경우 이러한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 만일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사람들의 성격상 극단적 민족주의로 가능성이 많고 이렇게 되면 기독교도 외세로 간주되어 박해에 직면할 가능성이 많다. 요는 땅만 횅하게 크고 국가기간산업도 없고 사회간접자본도 형성되지 않은 나라 백성들의 경제적인 필요를 누가 채워 있는 가이다.  

내가 도착하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광장에서 야당과 군중 수천 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기까지 했었다. 집권 공산당 (인민혁명당) 전횡에 불만을 품은 폭도들이 울란바타르의 중심가에 있는 공산당 당사에 불을 질러서 불에 횅한 모습이 몽골의 현실을 보여 주는 같았다.  시위가 벌어진 계기는 1주전 대선결과에 대한 야당과 시민들의 항의로 시작되었다. 공산당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야당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에도 다시 대선에서 공산당이 다수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경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몽골은 인플레가 심해 물가가  40 퍼센트 이상 오른 데다 부동산 가격은 배로 뛰었고 은행금리가 60 퍼센트나 되어서 서민들의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게 했다 .  물가상승과 인플레의 주범은 정부가 최저임금을 대폭 상승시키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통화발권을 무차별로 증가시킨 있다.  2007 선교사가 떠날 때만 해도 정부에서 발표한 1 최저임금이 6 뚜구르 (미화 60 상당)였는데 최근 10 8 뚜구르 (미화 108 상당) 올렸다 한다. 마땅한 재원도 없이 최저임금만 올려 놓았으니 사업하는 사람들도 당장 사업을 중단해야 지경이고 필연적으로 수반된 인플레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 올라  40 퍼센트를 넘는 실업인구를 포함한 가난한 대중들에게는 지옥 같은 삶인 것이다.  이는 몽골인 현지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가뜩이면 달러의 가치가 폭락해서 선교비 지원이 실질적으로 대폭 삭감된 우리 선교부 사무실도 이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다. 왜냐 하면 직원들의 봉급을 어쩔 없이 2배로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몽골에 나와 있는 모든 NGO 공통된 애로사항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산보 운동을 하며 아파트 주위를 맴돌았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그러한지 주위가 모두 보도 블록으로 덮여 있는데 아이들 놀이터에는 폐타이어로 만든 바닥이라 체조를 하노라니 아파트 관리인 사람들이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는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체조를 하면서 아파트 화단자리를 보니 가꾼 흔적은 하나도 없고 억센 잡초들만 우거져 있는 것이 사람이 오래 살지 않던 흉가 마당 같았다. 외국에서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몽골의 기후를 알면 " 그렇구나"하고 이해할 일이다. 1 3개월 정도만 식물이 자랄 있기 때문에 그나마 화단을 채우고 생존할 있는 것은 억센 잡초들 뿐인 것이다. 나중에 여행을 하면서 보니 이것은 몽골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공통된 현상이었다.

아침운동을 마치고 아파트에 올라가니 선교사 부부께서 아침식사약속이 9시로 되어 있다고 하셔서 먼저 나가셨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는데다 아침운동까지 1시간 동안 신나게 하니 허기진 배가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손님의 입장이니 주인처분만 기다릴 밖에 없다. 5분이면 충분한 거리라고 해서 9 15분전에 아파트에서 출발해서 식당인 캘리포니아 레스토랑으로 걸어갔다. 중국에서는 아침식사를 7시에 했는데 몽골은 유목민의 시간개념이라 그러한지 늦게 시작하고 늦게 끝난다. 식당들도 아침 9시가 지나야 문을 열기 때문에 아침식사 끝내고 나면 금새 정오가 된다. 현지인들의 경우 대부분 가게가 오전 11시나 되어야 문을 열기 때문에 곳에 업무를 추진하는데 애로가 많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교부 사무실도 우리가 묵은 아파트와 동은 다르지만 바로 건물의 15층에 위치해 있고 선교부 직원들 3 가정도 모두 곳에 거처를 두고 있어서 항상 애용하는 식당이었다. 거리야 얼마 안되지만 우리 일행 다리가 불편하신 도라의 할머니 때문에 식당에 도착하니 벌써 9 20분이었다.

도라는 콜럼비아 태생으로 올해 55세이고 도라의 모친은 72세이신데 다리가 불편하고 체중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좋아하셔서 특별히 모시고 왔다고 한다. 쟌은 홍콩에서 태어나서 15세에 미국으로 부모와 함께 이민 와서 42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중국식당을 29년간 경영해서 중국음식에 관한 완전 프로이고 상해 출신인 비비안의 남편이고 비비안과  도라 모두 에스더 사모가 가르치던 Emanuel Kaplan학교의 동료교사들이다. 가정 모두 에스더 사모와 오랜 교제를 통해 가족처럼 친밀한 사이인데 학교가 방학한 김에 선교사 내외를 좇아 몽골의 나담축제 관광차 왔다. 비비안의 남편인 쟌은 다혈질의 사나이이다. 나이가 57세로 나와 비슷해서 쉽게 친해졌다. 7 15일에 떠난다니 오래 머무시는 셈이다. 보아 하니 당분간 동행을 같다.

식당 안은 이름 그대로 미국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은은히 울리는 노래는 미국에서도 알려진 러시아 노래였다. 러시아의 지배를 오래 받은 몽골이라 모든 면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몽골은 자체산업이 극히 빈약하여 생필품조차도 수입품을 사용하는데 러시아가 과거에 길을 들여놓아 러시아 제품과 문화가 눈에 뜨이게 많다.  현재 몽골에서 공용으로 사용되는 알파벳도 러시아에서 사용되는 소위 사이릴릭이고 대다수 국민들이 몽골어 외에도 러시아어를 많아 안다고 했다.  몽골인들이 원래 사용하던 위구르 알파벳은 아람어의 일종인 시리악 알파벳에 근거한 것으로 1946 러시아가 사이릴릭을 강요하면서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1995년부터 정식으로 학교에서 몽골 알파벳을 가르치도록 칙령을 내려서 이제 보편화의 길을 가고 있다.

캘리포니아 식당은 이름에 걸맞게 미국식 식단을 사용해서 편안했다. 대부분 메뉴가 미화로 4불에서 6 수준이라 우리에게는 별로 부담이 가지 않지만 현지인들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급이다. 캘리포니아 오믈렛을 시켜서 먹으니 사람들 재료가 귀해서 그러한지 양이 먹기에 적당했다. 서비스로 주는 프렌치 브레드도 손가락만한 것을 달랑 3개만 가져 왔다. 5시도 안되어서 일어나서 운동도 많이 하고 있었기에 허기진 사람들이라 금방 먹고 달라고 하니 그게 다라고 한다. 오믈렛도 메뉴에는 분명히 계란 4개로 만들게 되어 있는데 눈에는 분명히 계란 개로 만들어 왔다. 양이 적은 나에게는 적당한 양이었지만 조금 기분이 언짢기는 했다. 거기에다 도마도도 얇디 얇게 저민 쪽에다 오이 쪽에 상치 잎이 다였다. 물자가 얼마나 귀한 나라인지 특히 야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실감했다. 몽골인들은 야채를 거의 먹지 않고 고기를 주식으로 사는지라 야채나 과일은 모두 중국이나 태국에서 육로로 수입한 것들이다. 그러하니 웬만한 사람은 먹어볼 엄두도 내고 사람들 습관이 되지 않아 싫어한다. 임집사 ( 선교사 여동생) 자녀, 에스더 사모와 , , 도라, 비비안, , 할머니, 선교사인 버니 앤드슨 부부 모두의 식대가 미화로 50 정도였는데 도라가 선듯 나서서 계산했다. 임집사가 내려고 다투다가 결국 도라가 이긴 것이다. 분들 경우 바른 분들이었다.  

식사를 마친 프로급 중국요리사 쟌이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게 것에 감사의 표시로 울란바토르에 거주하는 모든 선교사들 가족에게 저녁식사를 준비해 주겠다고 해서 함께 중국 야채시장에 가서 재료를 구매했다. 야채가게를 둘러보니 단지 가격이 비싸고 물자가 귀하다는 것만 빼고는 중국 시골 야채가게와 다를 것이 거의 없었다. 한가지 애로는 화폐가치가 너무 황당해서 나는 가는 곳마다 어떻게 돈을 지불해야 할지 감도 잡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야채와 고기 샵핑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와서 쟌이 20명분의 로멘과 고기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구경했다. 불과 2시간 만에 뚝딱 하더니 음식을 만드는 버렸다. " 과연 프로가 다르기는 다르구나." 저녁식사를 선교부에서 행정을 보는 래리네 집에서 하게 되어 있는지라 남는 시간에 산보나 하자고 선교사가 얘기해서 함께 시내구경을 했다.

느긋하게 시내를 걸으면서 보니 세계 각국의 차들이 뒤죽박죽으로 몰려다녔다. 전기로 움직이는 구형버스도 있었는데 달팽이 촉수처럼 생긴 개의 줄이 위에 있는 전기선에 연결되어 버스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버스 운전수가 조금만 길을 어긋나도 전기선에서 어긋나게 되어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전기 버스는 울란바타르에만 있는 대중교통수단인데 사용료가 가장 싸기는 한데 너무 낡아서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도로 시스템은 미국처럼 운전대가 왼쪽에 있는 차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는데 차들은 운전대가 오른 쪽에 있는 것들과 왼쪽에 있는 것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무엇이든 값만 맞으면 운전대의 위치에 상관없이 거기에 맞추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현대와 기아 차가 눈에 뜨이게 많지만 일제차도 많았다. 특히 도로사정이 열악한 관계로 일반승용차보다 SUV 종류가 흔했다. 미니밴도 많았는데 가격이 저렴한 러시아제 12인승이 많았다. 카뷰레이트형의  60년대 구형이지만 보수가 용이하고 가격이 7천불밖에 하지 않아 몽골인들이 중장거리버스로 애용한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몽골인들은 현대에서 제조한 Grace 선호한다고 했다.

몽골인들의 한국관은 극히 우호적이다. 몽골인들은 고대부터 한국을 솔롱고스” (몽골어로 무지개라는 )라고 불러왔다.  어떠한 연유로 몽골인들이 한국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름만 가지고도 몽골인들이 한국을 얼마나 아름다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지 만했다.  몽골인들은 솔롱고스하면 무조건 최고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몽골인들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솔롱고스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몽골 구간을 독점하고 있는 대한항공 노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어찌 승객들이 폭주하는지 성수기인 여름에는 특별기를 따로 매일 운행해야 하는 형편이고 가격도 미국 왕복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대한항공이 몽골 항공에다 비행기 1대를 무료로 기증한 대가로 독점권을 획득했던 것이다.

시내를 걷다 보니 색다른 빌딩이 하나 올라가는데 생긴 모양이 묘했다. 층수를 헤아려 보니 25 정도 되어 보인다. 쪽은 직선으로 올라가는데 다른 쪽은 완만한 반원을 그리는 현대식 건물이었다. 모양이 삼성종합건설에서 두바이에 짓고 있는 버즈 두바이와 아주 흡사했다. 아마도 일부러 세계 최고층 건물이 버즈 두바이의 축소판으로 지어서 몽골의 얼굴로 삼으려는 같았다. 작년에 착공했다는데 벌써 골조를 끝내고 유리로 겉을 싸는 작업을 거의 마무리 짓고 있었다.  날림공사인지 아니면 건설기술이 뛰어난 것인지 몽골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건물을 짓는다고 했다.  울란바타르에서 가장 현대식 건물이라는데 소유주는 대통령인 앵흐바타르라 했다. 그래서 건물의 별명이 대통령 아내의 한다. 국민들은 실업률 40 퍼센트의 고실업률, 인플레, 고물가 3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대통령의 아내는 기름진 배를 주체할 없는 현실을 풍자한 표현이다. 한참 걷다가 제법 그럴 듯한 5층짜리 콩크리트 건물이 보여서 선교사에게 물으니 몽골 국영 백화점이라 했다. 안에 들어가서 가게 구경도 하고 선교사가 필요한 몽골지도도 구입했다.

눈을 사실은 가는 곳마다 여직원들이 대부분이고 관리직도 여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몽골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유능하고 성실하여 일자리 여자들이 6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아니라 관리직도 여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는 러시아가 몽골을 지배하면서 스탈린의 명령으로 남자들은 교육을 시키지 않고 여자들만 교육을 시킨 결과이다. 몽골의 남자들이 워낙 강하고 용감하니까 용기를 꺾기 위해 일부러 남자들을 무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이 주로 관리직을 차지하고 남자들은 목동 노릇이나 막노동이나 하는 것이고, 가정에서도 여자가 돈을 벌어오고 남자는 애나 보는 가정이 대부분이다. 이러니 남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술기운을 빌어야 여자에게 마디라도 있다. 이런 세월이 장기간 계속된 결과 남자들은 자존감도 잃어버리고 용기도 잃어버려서 게으르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다수 남자들의 눈길도 술에 찌들고 삶에 찌들은 소망 없는 늙은이의 눈길인 듯했다. 거기에다 겨울 동안 얼은 얼굴이 풀리지 않아 모두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벌거죽죽한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교회의 지도자가 대부분 여자들인 것도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몽골의 남자들에게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이야 말로 나라에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라 하겠다.  

가지 놀란 사실은 울란바타르 최고급 백화점이란 곳인데도 냉방도 안되어 후덥지근한데다 갔다 놓은 물건들도 옛날 김천에서 백화점에 것처럼 후진 것들만 있는 것이다. 1 여름이 6 15일부터 시작해서 1개월에 불과하고 연중 8개월 정도가 겨울기후인 몽골인지라 사람들이 추위라면 진저리를 쳐서 여름날씨에도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백화점은 그래도 몽골에서는 제일 고급백화점인데 규모나 질은 중국 시골 읍내가게 수준이었다. 5층에 올라가니 관광객을 위한 선물가게가 있어서 둘러보았는데 도시 만한 것이 없었다. 그나마 모피 코트나 모피 모자들이 괜찮긴 한데 구매욕을 당길 정도의 가격도 아니었고 품도 없었다. 러시아의 지배 아래 오래 있던 나라여서 아직도 러시아 제품이 많았고 전자제품의 경우는 한국제가 고가품으로 진열이 되어 있었다. 과거 러시아의 지배로 인한 인연과 개방 한국과의 밀착이 가져온 현상이다. 몽골에 운행하는 버스도 대부분이 한국에서 수명이 다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다.  어떤 버스나 차들은 한국에서 사용되던 광고까지 그냥 있었다.

 

시내구경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니 쟌이 벌써 음식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님은 시차를 극복하지 못한데다 아침부터 나하고 운동도 많이 하고 선교부에서 보고회도 하고 백화점도 함께 다니고 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의자에 앉더니 금세 골아 떨어져 버렸다. 너무 곤하게 주무시는지라 시간이 되었어도 깨우지는 못하고 에스더 사모와 함께 15층에 위치한 선교부 사무실로 가서 사무실 컴퓨터로 아내에게 이멜도 보내고 안수고시 대상자들에게 필요한 연락도 취했다. 디렉터인 데니스 멥스 목사와 자비량으로 와서 섬기는 래리 새비지 선교사와 인사도 나누었다. 래리는 36년간 해군에서 근무한 베테랑으로 3 임준호 선교사가 떠난 직후부터 다르항에서 임병철 선교사와 동역하다가 선교부 본부가 울란바타르로 옮기면서 아내 수잔과 함께 옮긴 사람이다. 70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건강하시고 의욕이 넘치는 분들이다. 특히 수잔은 몽골어도 유창하고 섬기는 태도와 사랑이 몸에 배인 아름다운 성도이다. 이런 때문에 선교지가 외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9 15일이면 이제 텀을 끝내고 미국으로 귀국하신다니 섭섭했다. 분은 몽골 아이 둘을 입양해서 기르고 계셨는데 대학에 다니는 아가씨와  15 짜리 사내아이였다. 사내아이는  생김새가 영낙없는 한국아이 모습이었다. 가정 외에도 버니 앤드슨 목사 부부도 계신데 버니는 15년간 내슈빌 근교에서 얼라이언스 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하시다가 선교사로 나왔다 한다. 버니는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이라 무슨 일을 하든지 감당할 같다.

이멜을 보내고 나서 바로 아파트인 래리네 아파트로 갔더니 선교부 직원 가족 모두와 임집사 가족, 선교사 가족, 쟌네 일행 모두가 모여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조미료도 없이 간장과 소금으로 양념해서 요리를 했는데도 일미였다. 역시 프로는 프로였다. 쟌이 요리한 음식을 먹고 수잔이 만든 쵸코렛 파이와 버니의 아내가 만든 과일 파이까지 먹고 나니 아이쿠 소식한다고 적게 담아 왔는데도 포식했다. 디렉터인 데니스와도 허물없이 교제하면서 몽골선교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고 중국에서 내가 일에 대해서 설명을 했더니 관심이 많았다. 사실 몽골 필드는 10년여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지 사역자를 훈련해서 교회개척을 하게 하고 사역을 하게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기에 데니스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도 현재 다르항에 위치한 Alliance Bible Training Center 어떻게 하면 활성화할 방안을 세우는 것이었다. 임준호 선교사가 발안해서  준비해 6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뚜렷한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일어난 사건 중에 가지 나를 슬프게 만든 사건이 있다. 야채가게의 주차장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주차장이 너무 비좁아 억지로 주차하고 내리면서 쟌이 따로 걸어오는 아내에게 영어로 소리지르는 것을 들은 몽골 남자 사람이 손에 아이 머리만한 돌을 들고 때려 죽이겠다고 달려 왔다. 놀라기도 했고 성깔깨나 있는 쟌이 붙을 것처럼 나서는 것을 뜯어말리고 곳까지 차로 인도한 현지 몽골인 기사인 다운자이가 나서서 상황은 일단 수습되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는데 나중에 선교사 부인의 말씀을 들으니 몽골인들이 중국인만 보면 때려죽이려 정도로 감정이 나쁜데다 쟌이 생긴 모습이 영낙없는 중국인이라 생긴 사건이라 했다. 몽골인의 모습 가장 눈에 추하게 비친 모습이었다. 내가 몽골의 위정자라면 외국인을 위협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하는 본보기를 보여줌으로 몽골인의 태도부터 고칠 것이다. 세상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데 수백년전 역사의 상처를 아직도 되씹으며 국민들에게 적대감정을 불어넣는 위정자들이 아직도 땅에 있다는 것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싫으나 좋으나 이들은 중국식품과 중국제품에 의존할 밖에 없도록 지정학적으로 위치해 있는 나라이다. 어차피 관계를 가질 밖에 없다면 상대의 비위를 맞추어 줌으로서 최대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가 아닌가 말이다. 딱히 뚜렷한 산업이 없는 나라가 당장 길은 관광수입을 늘이는 것이 첩경인데 이런 식으로 외국인을 대하면 정나미가 떨어져서 다시 오지 않을 같다.

러시아 지배의 유산인 보드카에 대낮부터 취해서 외국인만 보면 시비를 걸고 물건을 훔치려 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에 추했다. 어떻게 보면 가엽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세계 10 자원부국이라 하나 이를 개발할 만한 사회간접자본도 확보되어 있지 않고 숙련된 인력도 태부족인 상황이라 외부에서 도와 주지 않으면 무엇 하나 성취하기가 어렵다. 인구가 워낙 적어 산업을 일으킬 만한 시장도 없고 경제규모가 되지 않아 젊은이들에게 직장을 제공할 여유가 없다. 그래도 무엇인가 산업을 일으켜 보려고 인구의 40 퍼센트인  110만을  울란바타르로 모았으나 정작 필요한 직장이나 산업이 일천하여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소망도 없고 비전도 없이 아침부터 술에 취해서 외국인으로 보이면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어 온다. 단순노동조차도 숙련노동인력이 거의 전무한데다 일거리를 제공해도 술주정과 게으름으로 말썽만 부리기 때문에 기껏 정부에서 도로공사 하나를 하여도 일꾼들은 중국에서 데려와야 하는 실정이라 한다. 정말 암담한 현실이다.

몽골인들의 현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보았다. 중에 하나는 우선 몽골인들의 의식개혁이며 째는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무엇으로 이들의 의식을 개혁하고 소망을 심어줄 있을 것인가? 선교사와 내가 적극 동의한 해답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소망을 이들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과거 모습도 몽골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불과 100 전만 해도 일제치하에서 소망 없이 술과 노름에 찌들었던 한국의 현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곤 한다. 누가 무어라 하던 한국의 오늘은 선교사들이 들고 왔던 복음의 열매이다. 바로 일을 위해 선교사를 포함한 25명의 우리 교단 선교사들이 몽골에서 수고하고 계신 것이다. 앞으로 3 동안 몽골을 둘러 보는 동안 각오가 더욱 새로워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