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4일 아침 작성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나는 원래 올해 9월 2일에 한국에 가서 거기서 3주간 머물며 고향인 김천에 가서 연로하신 누님과 자형, 우리 형님과 형수님, 우리 작은 아버지 이 분들을 뵙고 오려고 계획하고, 비행기표도 사고 서울에서 머물 곳까지 모두 준비했었다. 언제 가실 지 모르는 분들이라, 돌아 가시기 전에 미리 뵙고 오려고 했던 것이다. 작년에도 가려 했는데, 9월 교단일로 갑자기 터어키 여행을 일주일 다녀온 후 녹초가 된 데다, 거기에 덤으로 11월 바울의 발자취를 더듬는 터어키 여행까지 다녀 온 후 갑자기 Charleston, SC에 있는 교단교회의 임시담임을 맡아 매주 비행기로 오고 가야 해서 한국여행을 다녀올 염두를 내지 못해서 이번에는 꼭 다녀 오려 했다.
그런데, 내가 지난 6월 1일부터 심한 복통과 설사로 한 주 내내 제대로 먹지고, 자지도 못하고 고생하다가 6월 7일 혈액검사 결과 체내 염도가 118까지 떨어져 6월 8일 의사선생님이 급히 보내신 앰불란스를 타고 근처 Holy Name Hospital Emergency 에 입원해서 일주일동안 염도를 올리느라 몸이 말이 아니게 쇄약해지고 불안정해졌다. 6월 12일 체내염도가 정상수준인 134에 못 미치지만 안정수치인 133이 되어 퇴원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위궤양과 염도문제를 가진 상태로 해외여행을 하는 것은 무리인 듯 하여 한국여행을 취소해야 했다. 그래, 6월 13일 이를 누님과 가족들에게 카톡으로 연락한 후 6월 16일 카톡으로 누님과 영상통화를 했더니 아, 자형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김천 도립병원에 입원해 계신데 계속 혼수상태이고, 뇌혈관이 모두 막혀 있어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현재 자형은 한국 나이로 90세이고 우리 누님은 한국 나이로 85세인데 누님도 그동안 허리수술과 심장수술을 받으신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데, 이러다 두 분 모두 가실 것 같아 마음이 어려웠다. 그래, 우리 자형 의식을 회복케 하셔서 떠나시기 전에 가족들에게 인사라도 하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다행히 6월 21일 의식은 회복하셨으나 말이 어눌해서 도시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고, 팔 다리도 한 쪽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검사결과 직장에 6센티 짜리 암이 발견되어서 또 한번 놀라게 한다. 병원에서는 뇌경색과 암 둘 중에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하며 뇌경색 치료에 집중할 것을 추천했다. 그래, 어쩌면 거동은 제대로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좀 더 사실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자형도 자형이지만 내 마음에는 온통 누님에 관한 염려로 가득하다. 그래 오늘은 우리 누님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우리 어머님은 16살에 우리 아버지께 시집오셔서 그 다음해에 맞딸 김선분을 낳으셨다. 바로 우리 누님이시다. 그후 3년만인 20살에 우리 형님을 낳으셨고, 내가 태어난 것은 어머님이 27살 때였다. 이렇게 형님과 내가 터울이 7년이나 되는 것은 형님과 나 사이에 두 명의 형이 태어났으나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우리 집 둘째 아들이 아니라 넷째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두 형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아로 죽었기 때문에 나는 전혀 두 형을 본 적도 없다. 내가 태어난 해는 1952년 1월 4일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휴전협상을 앞두고 전쟁이 더욱 치열해 지자 부모님은 누님과 형님을 고향인 약숫골에 남겨 두시고 쌀 한 되만 가지고 그야 말로 맨 몸으로 김천에 오셔서 거기서도 가장 빈촌인 신음동 속칭 속구모티 산꼴짝 창구네 집 건너 방에 세를 드셔서 어머님은 거기서 나를 낳으셨다. 방은 벽지도 제대로 바르지 못한 흙벽이었고, 방바닥도 흙이 풀풀 날리던 창고로나 쓸 만한 험한 방이었다. 워낙 먹을 것이 없을 때라, 어머님은 젖 한 방울 생산하지 못하셔서 나는 매일 입이 찢어져라 울어 재꼈고, 어머님은 보다 못해 누님과 형님을 김천으로 불러오셔서 누님으로 하여금 나를 돌보게 하셨다. 그래,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10년 연상인 누나 등에 업혀서 다녔다. 엄마가 젖 한 방울 생산 못하셨으니 애기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내가 배 고프다고 빽빽 울어 재끼면 누님은 나를 업고 이웃 아줌마들 가운데 젖이 나오는 분들께 사정사정해서 젖동냥을 해서 나를 달래곤 하셨다. 그러나, 동냥젖이 어디 넉넉할 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언제나 빽빽 울어 재끼는 게 일이라, 우리 누나는 그런 나를 업고 달래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저녁 해 거름이 내려 앉으면 남의 엿집에 일하러 가신 아버님과, 김천 역전에 떡 팔러 가신 어머님을 기다리느라 동네 어귀 감나무 밑에서 빽빽 울어 재끼는 나를 업고 기다리곤 하셨다. 나는 어릴 때 너무 울어재껴서 그러한지 다들 내가 노래하거나 설교하면 목소리가 우렁차고 설득력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누나와 나는 항상 껌딱지처럼 누나 등에 딱 붙어서 어디든 함께 다녔다. 지금 뇌경색과 대장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계신 우리 자형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내가 함께 했고, 그후 두 분이 부모님 몰래 만날 때에도 나는 항상 동행했다. 우리 자형은 누나보다 나이가 대여섯살 정도 많은데, 얼굴이 참 미남이시고 성품이 온화하고 사교적이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분이셨다. 어떨 때는 우리 자형이 내게 돈을 주며 "가서 사탕 사 먹으라"고 하면 나는 총알같이 달려가서 사탕 한 알 사 가지고 원위치해서 우리 자형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청춘남녀가 만나서 뭘 좀 진행을 하려 해도 내가 중간에 딱 끼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서 감시하고 있으니 참 얄미웠을 것 아닌가? 나야 누나한테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던 때였으니 나를 나무랄 수도 없고 우리 자형 눈에 내가 가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이 결혼하겠다고 부모님께 말했을 때 우리 부모님 특히 어머님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서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부모님이 두 분의 결혼을 꺼려했던 이유는 자형 집안사정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우리 집이 아무 것도 없을 때 태어나셔서 우리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하시고 일찍부터 성냥공장에 다니면서 집에 오시면 엿공장일만 하시며 고생을 했는데, 그런 우리보다도 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 보내시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님의 단식투쟁에 못 이겨 결국 결혼을 허락했고, 두 분은 그후 60년이 넘도록 그야 말로 잉꼬부부의 삶을 사셨다. 누님은 원래 머리가 총명이 과하고, 언변이 조직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서 공부를 제대로 하셨다면 대단한 학자가 되실 지도자 감이셨는데, 어쩌겠는가? 당시야 "여자가 공부하면 뭘해" 하던 시대에 그것도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가정에 맞이로 태어나신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까? 누님은 거기에다 처녀 때 속구모티 동네 남녀청년들 팔씨름대회에서 일등을 할 정도로 체력까지 대단한 호걸이셔서 남자들도 수틀리면 누님이 붙잡고 밀어 자빠뜨리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우리 집 다섯 형제자매 가운데 대학을 간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만 그래도 누님 외에는 모두 고등학교는 졸업했다. 그래, 비록 나는 고학으로 대학공부를 하긴 했지만 항상 누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 한국에는 갈 수가 없고, 마음이 답답하던 중 그래도 위로해 드리고 싶어서 100만원을 누님께 보내드렸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주여, 두 분을 지켜 주셔서 다시 뵐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