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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친구였던 고 방인철의 모친 오춘환 여사는 나를 자기 아들보다 더 챙겨 주셔서 나는 그 분을 항상 오마니라고 불렀다.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서 나는 1969년 1월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떠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말이 독립이지 내 삶은 정말 고달픈 타향살이였다. 대학시절 가정교사 자리나 일거리가 있으면 하숙을 하고, 그나마도 힘들면 가정교사로 입주해서 살기를 되풀이했다. 그 시절 그래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은 인철이네 집을 방문한 때였다. 그래, 나는 걸핏하면 이 핑게 저 핑게 대고 인철이네 집을 찾았다. 1971년 형사들이 학생시위 주동자들을 색출하러 내가 살던 하숙집을 감시하던 때는 숫제 인철이네 집에 눌러 살았다. 그러다 보니 오마니와는 피붙이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래, 오마니는 "진태 색시감은 내가 구해 줄 거다"라고 하시며 오마니께서 운영하던 약국에 수습으로 오는 이화여대 약대생 가운데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고 어울리게 하시곤 했다. 그런데, 오마니 보는 눈과 젊은 내 눈이 같지를 않았다. 다들 집안 좋고 (그 가운데는 당시 유명한 대법관의 딸도 있었다) 마음씨 좋은 아가씨들인데 내 눈에는 여자로 보이지를 않았다. 거기에다 가진 것은 없었어도 자존감 하나는 하늘처럼 높았던 나였던 지라,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내 삶의 모델은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그래, 최소한 대통령 영부인으로 부족하지 않아야 내 아내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소개하는 족족 아가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도 정작 결혼상대로는 생각 않는 내 행태에 속이 상할 법도 하였지만 오마니는 끈질기게 내게 새로운 상대를 소개해 주시곤 했다. 오마니의 끈기는 드디어 보상을 받았다. 무려 서른 명 이상을 퇴짜 놓은 후에야 지금의 아내를 소개하신 것이다.
그게 아마 내가 삼성에 입사해서 활약하던 1977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약국은 서울 광장시장 정문 건너편에 위치했고, 아내의 집은 광장시장 내 빌딩이었다. 사업수완이 탁월하셨던 장인께서는 광장시장에 있는 자신의 땅에다 대형 빌딩을 건축하고 한 층에서 사시며 다른 층들을 시장내 포목상들에게 창고로 대여해서 큰 돈을 버셨다. 그래, 아내는 어릴 때부터 시장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약국에 아버지 약 심부름으로 거의 매일 드나들곤 해서 오마니와는 오랜 친분이 있었다. 당시 처가에는 아내만 있었던 게 아니고, 연년생 언니도 미혼이어서 언니를 시집 보내는 것이 숙제거리였다. 그때 마침 처가에 놀러 오셨던 친척 아줌마가 가시는 길에 약국에 들러 오마니와 수다를 떨던 중 처형 얘기를 꺼내며 좋은 혼처를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아 오마니가 하신다는 말이, "아주 좋은 신랑감이 있는데, 언니 말고 동생 명자를 소개하고 싶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 아내와의 첫 만남은 당시 종로 2가에 있던 정일학원 근처 어느 카페에서 오마니와 함께 이루어졌다. 정일학원은 내가 재수할 때 다녔던 곳이라, 이 카페는 그나마 내가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낮에 만났는데, 그게 우리 둘만의 데이트로 발전하여 그날 함께 저녁식사에 가벼운 한 잔 술까지 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새끼 손가락을 걸어 결혼을 약속했다.
처형을 제치고 먼저 결혼하자는 내 제안에 아내는 물론이고 처가식구들은 "동생 먼저 결혼하는 법은 없다"고 결사반대해서 나는 술 한 잔 걸치고 처가에 쳐들어 가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까지 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있다. 당시 나는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중풍으로 와병 중이셔서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우셨던 때라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서 손주를 안겨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한 장모님이 결혼을 허락하셨고, 우리는 그 이듬 해인 1978년 5월 2일 서울 행복예식장에서 혼례를 올렸다. 혼례를 올리기까지 사연이 제법 많았다. 나는 "그냥 어디 아무 절에나 가서 찬 물 한 그릇 떠 놓고 절만 하면 된다"고 장모님께 말씀드렸다가 장모님 졸도하시게 만들 뻔 했다. 당시 나는 불광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내 막내 동생 순남이와 둘이 전세살이하고 있었는데, 장모님은 "그래도 작은 집이라도 한 칸 있어야 한다"고 삼선교 시장 위 아파트를 하나 마련해 주셨다. 거기서 나는 내 혼자 허혼서를 작성해서 그걸 손바닥만한 패물함에 넣고, 광장시장에서 포목 한 줌을 사서 넣고 친구 방인철, 강영원, 정우량 세 사람과 함께 1978년 초 신반포 아파트에 있는 처가로 갔고, 그해 5월 2일 대망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 밤 썰렁한 아파트에서 혼자 아버지 이름을 허혼서를 작성하며 나는 좀체 흘리지 않던 눈물을 쏟았다. "나는 어찌 이리도 힘들게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나!" 쥐꼬리만한 저축까지 모두 털어서 아파트 사는 데 보탰기 때문에 완전히 빈털털이였던 나는 혼례비용도 없어서 회사에 가불을 신청해서 그 돈으로 혼례에 충당했다. 마침 어제가 우리 딸 은정이의 47세 생일이라 오늘 아침 앉아서 생각하니 잊고 지냈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